[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게임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2018-02-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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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홍열 초빙 논설위원·정보사회학 박사]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에 따른 중독 및 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할 예정이다. WHO가 펴내는 국제질병분류(ICD,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의 개정 초안 ICD-11에서 게임 중독 및 게임 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한다고 예고했다. ICD-11의 내용들이 최종 결정된 것은 아니다. 금년 5월 예정인 2018년 세계보건총회에 ICD-11이 제출되고 통과돼야 효력이 발휘된다. 그 사이에 일부 내용이 수정될 가능성은 있지만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ICD-10에서 ICD-11로의 개정작업은 2007년부터 시작됐고 전문가들의 연구와 논의를 거쳐 초안이 작성된 이후 2년간의 현장 시험(Field Trial)을 거쳐 금년 5월 총회에 보고될 예정이다.

ICD는 국제적으로 통일된 질병, 상해, 사인분류를 위해 세계보건기구가 제안한 국제 분류체계다. 국내외 보건의료 분야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고 국내에서는 ICD를 한글로 번역, 세분화해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Korean Standard Classification of Diseases)를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KCD는 질병 이환 및 사망원인 통계, 건강보험 진료비 청구, 진단서 발급 등을 위해 꼭 필요한 시스템이다. ICD-11에 게임에 따른 중독 및 장애가 질병으로 올라오면 KCD에도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주요 게임회사와 게임업계가 게임과 관련된 ICD-11의 내용을 반대하는 이유다. 게임이 질병으로 분류되는 순간 의사들은 환영하겠지만 게임 관련 기업들은 곤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게임 자체가 질병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ICD-11 ‘중독 행동에 따른 장애' 카테고리에 '게임 장애(Gaming disorder)'로 명명된 항목이 추가된다.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 오랜 시간 게임, 일의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게임에 몰두하는 행위, 게임이나 게임내용에 관련된 위험한 행위의 가능성 때문에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다고 되어 있다.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 게임중독이 문제라는 것이다. 적절한 수준이면 상관없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개인과 사회의 자정능력 대신 의사의 진료와 처방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제 게임은 도박과 알코올처럼 중독이 예상되는 예비 질병이 됐다.

ICD-11 초안에서는 온·오프라인 게임 구분 없이 모든 게임에 대해 게임중독을 적용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주요 대상은 온라인 게임일 수밖에 없다. 오프라인 게임의 경우 중독성을 확인하기도 힘들고 여러 사람이 하는 경우가 많아 개인 질병 분석으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온라인 게임의 경우 실제로 게임중독에 걸려 사회생활이 곤란하거나 게임 속 가상현실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들도 보도된다. 온라인 게임 중독은 추적하기도 쉽고 게임 콘텐츠 분석도 용이해서 진단과 처방 역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사회적 여론도 우호적이기 쉽다. 중·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 입장에서는 게임을 말릴 명분이 생긴다.

그러나 WHO의 ICD-11은 온라인 게임의 일부 부작용을 문제 삼아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를 질병에 취약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게임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인류가 직립을 시작한 이후 인간의 고유한 사회적·문화적 행위였다. 게임, 놀이, 유희를 통해 인간들은 척박한 자연에 대항할 힘을 얻었고 집단적 유대감을 형성해왔다. 게임과 놀이는 스포츠로 발전하기도 하고 예술로 전환되기도 하면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왔다. 어느 순간에도 사람들은 게임과 놀이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노동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게임 역시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개인적·사회적 행위였고 생산적인 행위였다.

이런 게임 놀이를 비교적 최근 등장한 온라인 게임의 일부 사례에 기초해 문제 삼는 것은 현상이 본질을 압도하는 제도적 폭력에 가깝다. WHO처럼 권위 있는 기관이 의학적 판단을 하면 거부하기 힘들다. 그러나 의학적 판단 뒤에는 불합리적 결정 과정이 있는 경우도 있다. 미국 노스웨스트 대학의 크리스토퍼 레인 교수가 쓴 <만들어진 우울증: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에서는 일반적인 수줍음이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비합리성을 보여준다. 미국 신경정신의학계와 정신분석학계의 오랜 갈등과 주도권 싸움이 있었고, 싸움에서 이긴 신경정신의학계의 주장이 수용돼 수줍음은 질병이 되었고 사람들은 조금씩 약을 먹고 환자가 되기 시작했다.

불안, 흥분, 아쉬움, 절망 등은 유한한 인간의 본성들이고, 자연과 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개인적·사회적 기제들이다. 불안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불안한 순간 힘들어하고, 흥분되는 순간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심리적·정신적 행위가 계속 질병으로 규정되기 시작하면 남는 것은 의사와 환자뿐이다. 생체의학적 질병 분석과 달리 심리적·정신적 현상에 대해서는 질병 규정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 게임의 일부 부작용을 구실 삼아 인간의 자유로운 영적 활동을 규제해서는 안 된다. 규정이나 규제가 많은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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