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뒤면 가상화폐 거래 실명제가 시행되지만 당장 시장의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이 이번 제도에 대해 "은행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할 것"이라면서도 "법적 책임은 철저히 묻겠다"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은행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의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해야 할 금융당국은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고, 본의 아니게 전면에 나서게 된 은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당국이 손을 놓고 있는 사이 거래소는 '벌집계좌'에 이은 또 다른 '편법'으로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30일부터 시행되는 실명제와 관련해서는 일단 까다롭기는 하지만 실명 확인을 거치고 나면 1인 다계좌, 개인 간(P2P) 가상화폐 거래도 가능하다. 신규 투자를 원하는 사람은 지인의 계좌를 빌려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강영수 금융위 가상통화대응팀장은 "최근 금융위가 발표한 '가상화폐 관련 금융부문 대책'은 가상통화 자체를 규제하는 게 아닌 은행에 대한 규제"라며 "가상화폐 거래는 실명만 확인되면 여러 거래소를 통해 거래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당국이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의 총 책임자를 '은행'으로 지정하면서 은행의 부담만 커졌다. 실제로 가상화폐 거래소와 계약을 맺고 있는 신한(빗썸·코빗), NH농협(빗썸·코인원), IBK기업은행(업비트)은 "실명제가 시행돼도 당장 신규 계좌를 개설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단 기존 고객에 대해서만 실명계좌를 발급하고, 신규 계좌는 추후 시장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사실상 신규 계좌 발급을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금융위에서는 "내부적으로 위험 관리 없이 가상계좌가 제공되면 은행들이 자금세탁과 관련해 심각한 평판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며 "(가이드를) 지킬 자신이 있을 때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새로운 금융 영역인 데다가 미래 예측도 어려운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은 채 법적 문제가 생기면 철저히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에 은행에서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 신규 투자자 유입 더뎌지면서 기존 투자자 불만 커져
문제는 시장에서 투자자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투자자들은 가상계좌 발급이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신규 투자자들이 시장에 몰리고, 자연스럽게 가격 반등에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라면 신규투자자 유입이 불가능하고 시장 냉각기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거래소에서도 신규 투자자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각종 편법을 동원한 신규회원 유치에 나서고 있다. 신규 가입자의 입금이 자유로운 중소형 거래소에서 가상화폐를 사서 대형 거래소로 옮기거나, 대형 거래소에 가상계좌가 있는 지인을 통해 상품권을 구매한 후 자신의 계정에 충전하는 식의 투자자금 편법 입금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당국에서는 이런 방식을 사실상 유사수신으로 규정하고 있어 피해는 고스란히 투자자들에게 돌아갈 우려가 크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에 모든 책임을 맡기면 어느 은행이 나서서 신규 계좌 발급을 할 수 있겠느냐"며 "당국이 은행과 시장 옥죄기에만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거래소에서는 편법 운영으로 '제 배 불리기'에 급급해 30일 이후 가상화폐 시장이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