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우려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작은 돈을 투자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성공 스토리와 단기간에 많은 돈을 잃어 낙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가상화폐가 뭔지도 몰랐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일상적으로 가상화폐를 소재 삼아 대화를 하고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아직도 잠재성이 큰 투자 분야라는 컨설팅 회사의 광고도 여전하고 투기장으로 변해버린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나오고 있다. 법무부의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 가능성 발언 이후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청와대 게시판에 가상화폐 규제 반대 청원을 하고 있다. 청원인 20만명이 넘으면 청와대는 공식 답변을 해야 한다.
특별한 사안이 없다면 여론에 민감한 청와대가 거래소 폐지 같은 극단적 대응을 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정부나 청와대가 할 수 있는 일로는 가상계좌 실명확인 시스템 도입, 법인계좌를 개설해 그 아래 여러 장부를 구성해 거래하는 일명 벌집계좌의 원천 금지, 가상화폐 거래에 대한 과세 실시 등이 예측된다. 가상화폐 거래를 법적으로는 실정법 안에서 규제하고, 내용적으로는 불온시해 장기적으로 국내 금융 질서에 순응케 하거나 도태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공공기관에 퍼지고 있는 가상화폐 거래 금지령과 지난 11일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기자회견 당시 가상화폐는 '돌덩어리 투기' 라는 표현이 그 사례들이다.
지금 상태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담론이다. 가상화폐를 둘러싼 담론의 생산과 유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유시민씨의 발언과 같은 극단적 주장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투기에 대한 우려는 이해되지만 가상화폐 자체를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용해 누군가가 장난쳐서 돈을 뺏어 먹는 과정’이라는 그의 주장은 지극히 편파적이다. 어리석은 대중과 대중을 악용하는 소수 뛰어난 사람들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의 투기 과열 현상이 없었더라면 그의 이 발언조차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최근 투기는 한국과 중국 등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화폐의 본질 또는 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고민이다. 자본주의 발전 이후 화폐를 매개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의 모든 것들은 화폐로 측정 가능하게 됐다. 감정, 예술, 구원, 삶과 죽음이 화폐로 측정되고 화폐에 의해 인간의 등급이 결정된다. 화폐는 스스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부의 쏠림 현상을 더욱 가속화한다. 화폐의 글로벌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미국의 달러 시스템이다. 미국의 금리 결정에 따라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상황이 일시에 불안정해지고 국민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거나 고금리에 시달리게 된다. 노동력이 없어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고 화폐가 없어 자살하고 화폐가 없어 삶의 희망을 접는다.
만약 지금과 전혀 다른 화폐가 나온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을까? 공동체마다 스스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고 화폐에 대한 주권 유지가 가능하다면 세상은 좀 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미국 중심에서 벗어나고 특정 국가에서 벗어나 상품과 서비스를 거래할 수 있다면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로서는 쉬워 보이지 않지만 대안으로서 고민할 이유는 충분하다. 가상화폐의 사회적 담론을 계속 확산시켜 나갈 필요가 여기에 있다. 현재 안타깝게도 가상화폐의 거래 부작용만 논의되고 있지만 새로운 시도에 부작용이 없는 경우는 없다. 인간의 탐욕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하지 못한다. 탐욕은 자본주의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가상화폐 거래소를 투기장으로 만든 인간의 탐욕 이면에는 새 시대를 희망하는 욕망도 동시에 존재한다. 인간의 기본 생존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노력과 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정권에 따라 수시로 정책이 변한다. 스스로 생존하기 위한 노력들이 때로는 국가와 갈등하면서 불편하게 보일 때도 있다. 가상화폐 명칭을 둘러싼 논쟁 역시 본질적으로 이런 갈등을 반영한다. 가상화폐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해 가상화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가상화폐의 탈규제적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가상화폐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이런 진지한 사회경제적 성찰도 동시에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시선은 다양한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