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풍도(馮道)의 관점

2017-11-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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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풍도(馮道)를 어떻게 볼 것인가. 황소의 난으로 어지럽던 당(唐)왕조 말엽에 태어나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관통한 정치인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최악의 간신배에서 최고의 명재상까지 극과 극이다.

그도 그럴 것이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 다섯 왕조를 거치며 열한 명의 임금을 모셨다. 송(宋)왕조의 사학자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정절을 지키지 않은 여인은 얼굴이 예쁘고 바느질 솜씨가 좋아도 정숙하다 할 수 없고, 충성스럽지 않은 신하는 재능이 많고 공적이 뛰어나도 훌륭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침에는 서로 원수였는데 저녁에 임금과 신하 사이로 변하자 표정과 말투를 바꾸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면서 “비록 잘한 일이 몇몇 있다고 해서 어찌 괜찮다고 평가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이후 풍도는 절개와 염치가 없는 인물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물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위인에서 반역자로, 간웅에서 고금의 영웅으로 바뀐다. 나폴레옹도, 조조도 그랬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졌다. 풍도 역시 그랬다.

세월이 흘러 명(明)대의 사상가 이탁오는 장서(藏書)에서 “오대십국의 혼란기에 백성들이 전란의 참화를 그나마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풍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먹고살도록 노력한 덕이다”고 극찬한다. 맹자가 “사직(社稷)이 중요하지 임금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정치의 요체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사(社)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직(稷)은 백성을 먹여살리는 것이다. 백성이 하늘이고 민심이 천심이며, 이를 거스르는 임금은 방벌(放伐)의 대상이란 이야기이다. 요즘으로는 공직자에게 제민(濟民)과 안양(安養)이 우선으로, 이에 반하면 대통령도 탄핵하고 쫓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풍도와 비슷한 인물을 우리 역사에서 찾자면 조선 중기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을 들 수 있겠다. 선조·광해·인조를 섬기며 공직 64년 중 40년을 재상으로 봉직했다. 임진왜란 때는 이조판서로, 인조반정 때는 영의정으로, 정묘호란 때는 영중추부사로 혼란기를 수습했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 초가집 한 채가 전 재산이었다. 그만큼 청렴으로 봉공(奉公)했다.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도 “이 한 사람으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다”고 칭송했다. 이는 맹자가 말한 ‘임금보다 사직’이 아니던가. 또 임진왜란 때 “신에게 아직 배가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했던 충무공 이순신도 “이나마 수군이 유지된 것은 내가 아니라 상국(이원익)의 힘이다”고 공을 돌렸다.

현대사에서 찾자면 고건 전 총리쯤 아닐까. 박정희 시대에 관료로 입신해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장관으로, 총리로, 시장으로, 정부의 특별기구 위원장으로 봉직했다. 이 같은 이력은 행정가로서도 유능했지만 정치적으로도 무색무취해서 가능했다는 시각이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공직자로서 맹자가 말한 '임금보다 사직', 즉 최고 권력자보다 국민의 안녕을 우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풍도가 좌우명처럼 새긴 “만인과 다투지 않고, 실무를 중시하라”는 말은 그의 평소 처신 및 처세와 꼭 들어맞지 않는가.

이원익은 정치에서 무엇보다 소통을 강조했다. 선조에게 “국토는 넓고 백성은 많으니 한 사람의 총명으로 어찌 두루 듣고 볼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민심을 북돋우고 언로를 활짝 열어야 하는데, 백성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입을 닫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태평성대로 여길지 모르나, 위태로운 화가 저만치 닥쳐 있는데도 알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진언한다. 구중궁궐에서 몇몇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만기친람(萬機親覽)의 의지를 보이는 데 대한 지적이다.

그는 공평한 인사도 주문했다. “대상 인물을 잘 모른 채로 낙점하거나 혹은 한두 가지 말이나 일이 거슬린다 하여 배제하면 곧은 사람은 멀어지고 아첨꾼만 조정을 채우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좁은 풀(Pool)에서 코드 인사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다. 당시 이원익의 주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의 양상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청렴했던 그는 “이익을 보면 그것이 부끄럽지 않은지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만, 물러났을 때는 누옥 한 채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동시대 이순신과 권율은 알아도 이원익은 잘 모른다. 그것이 안타까웠을까. 정약용은 “궤 속의 옥은 공인(工人)도 알 수 없다. 군자는 비단옷 위에 홑옷을 껴입는다”고 평했다.

요즘 이런 공직자가 과연 있는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밀물처럼 들어온다. 정권을 관통해 국민에 봉사할 큰 그릇이 없는 것인가, 그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공직을 전리품으로 여겨 끼리끼리 챙기느라 그러한가. 뜬구름을 향한 부유(蜉蝣)의 날갯짓이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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