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슬픈 자화상은 끝나지 않았다. 모순과 갈등의 위기로 점철된 절름발이 정치는 현재진행형이다. 소통과 협치는 없다. 정치권 스스로 발로 걷어찼다. 사실상 자진 거부다. 그 자리에는 ‘제로섬(zero-sum game·영합) 게임’인 정파적 진영논리만이 남았다. 너와 나를 가르는 ‘피아의 구분’이다. 공존의 미학은 간데없이 정쟁만 나부낀다.
언제나 그랬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1992년 문민정부 출범, 1997년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 2002년 시민주권론 대두, 2007년 보수의 정권 재창출, 2012년 헌정 사상 첫 과반·여성·부녀 대통령 탄생, 2016년 국정농단 게이트, 2017년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과 3기 민주정부 출범까지···. 정치권 변곡점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관례로 등장했다. 정치권은 앞다퉈 새로운 대한민국을 역설했다.
이른바 정치권발(發)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두 가지 이상의 악재가 겹친 절대 위기)'이다. 2017년을 한 달 반 남긴 현재, 1987년 체제를 넘는 ‘포스트 신(新)질서’는 유령처럼 여의도 밖을 배회한다. ‘낡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수와 진보의 치킨게임··· 거버넌스 위기 대폭발
정치전문가들에 따르면 정치 갈등은 그 자체로 선악의 개념은 아니다. 정치는 언제나 갈등을 수반하는 다른 이름이다. 갈등의 변천사를 보면, 갈등에 대한 부정적 가치관이 대두한 과거에는 ‘갈등 제거론’이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고전적 갈등 관리론은 ‘갈등 수용론’을 거쳐, 현재 ‘갈등 조장론’으로 발전했다. 갈등은 근절의 대상이 아닌, 긍정적인 부분을 끌어내는 상호주의적 관점이 대세다. 정치권 갈등을 ‘효율성’과 직접적으로 연결해 평가 절하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긍정적 승화를 막는 정치권 갈등의 민낯이다.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면서 한반도 전역이 풍전등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잇따른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등 외치 위기, 한·미 동맹 재확인과는 별개로 과제로 남은 ‘트럼프 청구서’는 언제든 불붙는 휘발유성 의제다.
내치 위기는 한반도 위기론을 한층 부추긴다. 내수는 빈사 상태인데, 정치권은 여전히 ‘성장이니 분배니’ 이분법적 사고에 갇혔다. 중국이 기침만 해도 감기에 걸리는 허약 체질로 인해 경제의 틀을 바꾸는 건 뒷전이다. 한국 정치가 여전히 87년 체제 때의 ‘민주 대 반(反)민주’ 구도에 갇힌 결과다.
◆승자독식에 발목 잡힌 정치···“무능 숨기려는 기득권 공생전략”
대립하는 두 개의 프레임이 ‘진보 대 보수’ ‘적폐 대 신적폐’ 등으로 치환했을 뿐, 본질은 대동소이하다. 정치의 본질인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 설정은 물론, 정치의 파생물인 자원배분 문제와 의사결정 집행 과정 등 사회 전반이 위험으로 치닫고 있다는 의미다. ‘위험사회’의 일상화다.
갈등의 본질은 ‘승자독식’ 구도 선점을 둘러싼 헤게모니다. 대선 과정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새로운 권력투쟁에 돌입한 결과, 정부·여당은 통치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일방통행, 야당은 집권당에 대한 힘의 굴복을 거부하는 장외 투쟁 등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정파적 갈등은 행위의 모순으로 이어진다. 모순 정치의 대명사인 이른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문재인 정부와 20대 국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정치권의 갈등과 모순은 정치 한 분야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 갈등을 넘어 빈부·지역·세대 갈등에 휩싸였다. 군부독재정권 시절 보혁과 동서에 국한한 정치권의 갈등은 1980∼1990년대 눈부신 경제 성장을 거치면서 빈부 격차, 이후 세대 갈등이라는 거센 파도가 한반도 전역을 감쌌다. 여러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한반도 전역은 3류 정치의 포로로 전락했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무능을 숨기려는 공생전략과의 단절을 주장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 및 ‘무엇이 우리정치를 위협하는가’라는 저서를 통해 “정치권이 국민의 실생활과 거리가 먼 이념갈등을 편향적으로 동원해 국민을 편 가르고, 국론을 분열시킴으로써 국민들의 관심사인 경제적 양극화를 둘러싼 갈등을 덮어버리면서 민생정책을 외면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