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성한다
나는 소위 ‘386세대’다. ‘386’은 약 20년 전 즈음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 나이’를 특징지은 조어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586’이라 하겠으나 그냥 ‘386’으로 호칭하겠다. 이들은 대체로 6·25전쟁 후 줄줄이 태어났던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이거나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산아제한으로 단출하게 태어난 핵가족 세대다. 같은 ‘386’일지라도 가족문화가 다른 두 세대가 섞여 있는데 나는 전자에 해당된다. 대체로 전자는 후자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라며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초가집 지붕이 함석과 슬레이트로 바뀌었고, 골목길도 넓혀졌다. 귀했던 전기도 들어왔다. 고속도로에 공장굴뚝들이 여기저기 솟았고 나라에 돈이 좀 돌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베이비부머 끝자락이던 나부터 교육의 혜택이 수직상승했다. 머리 좀 있고 의지가 있으면 공고, 상고, 일반고까지는 ‘넘사벽’이 아니었다. 물론, 더더욱 가난했던 예외는 있었겠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던 졸업정원제로 입학정원이 늘어난 탓에 나는 지금의 고등학생들보다는 훨씬 덜한 실력으로도 ‘운 좋게’ 소위 ‘SKY’에 합격했다. 졸업정원제의 취지와 다르게 이로 인해 졸업을 못했다는 학생은 들어보지 못했다. 1980년대 대학은 민주화 투쟁이 극렬했다. 대학생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뉘었다. 공부하는 학생, 데모하는 학생, 술이나 퍼 마시는 학생.
공부하는 학생 말고는 학점이나 스펙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땡땡이(무단결석)도 예사였다. 평균학점이 형편 없었지만 S전자, D화학 등 굴지의 기업을 입사시험 없이 추천서와 면접으로만 합격했다. 심지어 다른 길을 가겠다 배짱 부리며 입사를 거절하기도 했다. 그리 다니나 이리 다니나 졸업 후 취직은 어렵지 않았다. 진지하게 공부했던 친구들은 공기업, 국가투자기관 등 소위 ‘신의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우리보다 앞서 고생했던 산업화 세대 덕분에 경제가 급속 성장하면서 일자리가 넘쳤기 때문이었지 결코 우리가 유독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입사한 대기업 연봉은 결혼을 주저할 수준이 아니었다. 주택 200만호의 신도시 바람이 불면서 맞벌이 5년 만에 작으나마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눈치 빠른 친구들은 강남의 지하셋방으로 진입해 이사를 반복하는 기법으로 그곳 아파트 두세 채를 확보하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그 즈음 정보화사회가 도래했다. 대리급이던 나는 산업화 세대 형님들에 비해 ‘PC(퍼스널 컴퓨터)’에 금방 적응했다. 와중에 IMF사태가 터졌다. 그러나 그 직격탄은 운 좋게도 차·부장급 이상의 산업화 세대들이 방패가 돼주었다.
IMF사태가 극복되자 벤처기업 광풍이 불었다. ‘386’들은 발 빠르게 ‘컴통텔’ 창업에 나섰고 눈먼 돈이 몰렸다. 나 역시 ‘우리사주’와 신규 분양 아파트 ‘프리미엄’ 덕에 아파트를 넓혔다. 명멸하는 벤처기업 중 일부는 거대 포털이나 게임기업 등으로 우뚝 섰다. 와중에 ‘법카(법인카드)는 비용처리 된다’며 흥청망청했다. 뒤이어 대학입시에 논술이 도입되면서 운동권 토론으로 다져진 ‘이빨의 386’들이 대거 강남의 고액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갔다. 이들과 달리 정치권으로 진입했던 ‘386’들도 민주주의 혁신 대신 적폐와 기득권자의 단맛에 취한 권력자로 만족했다.
이토록 운이 좋았다. 윗세대의 고생 덕분이었다. 물론 그들 역시 국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고생의 과실은 거두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꿀단지에 빨대를 꽂아 빨아먹기 급급했던 나는 내 자식 세대들에게 살기 좋은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는 의무를 망각했다. 대학 ‘인서울’이 어렵고 취업이 어렵다는 젊은이들에게 그저 ‘노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만 치부했다. 노오력 아니라 노오력 할아버지라도 양질의 일자리 자체가 절대 부족하고, 노오력하면 올라갈 수 있는 계층사다리도 남김 없이 붕괴됐다는 것을 몰랐다.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운 데다 윗세대가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집값 때문에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한다는 것을 몰랐다. 어렵게 결혼을 하더라도 허리 휘는 주거비, 양육비, 사교육비에 아이들 키우기가 겁나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을 몰랐다. 취업난과 부동산 착취경제에 치여 달콤한 청춘의 연애를 포기하고, 종족번식의 욕구마저 거세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을 몰랐다.
나는 공존을 위해 가진 자들이 양보하는 정치·경제 민주화에 눈뜨지 못했다. 그런 것들은 나라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러한 정의의 실현을 위해 어떠한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경우도 없었고, 어려운 이웃에도 인색했다. ‘청년 자살률 일등, 출산율 꼴등’ 뉴스도 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헬조선’이라는 그들의 고통스런 비명을 ‘노오력 없는 투정’으로나 여겼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그 무엇도 말할 자격이 없는, 부끄러운 ‘38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