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소년등과 대기만성

2017-06-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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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그래그래

소년등과 대기만성

예부터 살면서 겪지 말아야 할 ‘3대 불행’으로 ‘소년등과(少年登科), 중년상처(中年喪妻), 노년무전(老年無錢)’이란 말이 전해지고 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크게 출세하는 것(아마 정유라씨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중년의 나이에 배우자를 잃는 것, 늙었는데 가난한 것을 이른다.

이 대목에서 ‘왜 중년에 남편 잃은 여자는 없느냐’며 이것도 차별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은이 서 말’이란 속담에 따른다면 상부(喪夫) 아닌 상처가 더 불행인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또 ‘마누라 죽으면 화장실에서 웃는다’는 다른 말이 떠도는 것을 보면 어느 말이 맞는지 헷갈린다. 결론은 예부터 전해오는 말이라도 다 각자 사정에 따라 맞고 틀리고 하는 것이니 무조건 옳다고 믿을 필요는 없겠다는 것이다.

현역에서 대부분 은퇴하고 노후를 즐기시는 분들과 등산을 같이 다닌 적이 있었다. 그분들은 중견기업을 일구신 분, 사회적으로 명망을 쌓으신 분, 평범하게 노후를 맞으신 분 등 다양했다. 등산 중 쉬는 사이 ‘살면서 뭐가 가장 중요한지 가르침을 주시라’고 여쭸다. 금방 중론이 모아졌다. ‘겸손해서 손해 본 적 없다’는 것. 그러나 결론은 “돈, 명예 다 필요 없어. 건강한 놈이 이기는 놈이여. 돈 산더미로 쌓아 놓았는데 휠체어에 앉아 남이 떠주는 밥이나 먹으면 그게 뭐야. 힘 있다고 깨춤 추다 늘그막에 감방 가는 놈은 더 한심한 놈이고!”였다.

소년등과의 예야 부지기수이나 선뜻 떠오르는 이가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이 장군이다. 19세에 등과해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니/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라며 장검을 유감없이 휘둘렀다. 술자리에서 감히 세조에게 대들었다가 건방죄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27세에는 무려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까지 올랐지만 세조가 죽자마자 역모로 몰려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거열형, 국어사전에서 뜻을 읽기만 해도 간이 오그라들 만큼 무시무시한 형벌이다.

소년등과와 정반대인 ‘인내와 겸손’ 모드의 대기만성(大器晩成) 자 역시 흔하지만 선뜻 떠오르는 이는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중달)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만큼 후세인들은 제갈공명에게 연전연패했던 중달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조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더할 수 없이 겸손했다. 라이벌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위하던 때 그의 나이가 칠십이었다. 의약술과 건강학이 발달한 지금과 비교하면 구십을 넘겼다 해도 무방할 나이다. 조상의 심복이 지방관리 취임 인사를 핑계로 염탐하러 오자 중달은 일부러 손을 떨어 약사발을 흘렸고 귀조차 안 들리는 것처럼 연기를 펼쳤다. 조상은 방심했고, 중달은 결정적 기회를 잡아 패권을 차지해 그의 손자 사마염이 진(晉)나라를 건국하는 초석을 다졌던 것이다. “무릇 사람은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사마의 중달이 남겼던 명언이다. 그런 인내와 겸손은 인질 14년과 40년의 기다림 끝에 60세 들어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진다”는 명언을 남겼다. 언제 어디서건 무리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물론, 소년등과의 불행이 법칙은 아닌 만큼 끝까지 화려하거나 훌륭한 삶을 산 위인들도 수두룩하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그렇다. ‘눈이 올 때면 다 내리길 기다렸다가 조용히 빗자루로 쓴다’고 했던 것의 인생통찰은 인내이자 겸손이었다(물론, 절대로 그게 아니라 말할 이도 있겠지만 한쪽 면만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생 아니겠는가). 반면 ‘회장님’들이 성장가도를 달렸던 박정희 군사정권 때 정반대의 지점에서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한 시인이 나이 들어 보여주는 혼란스러운 변화를 보자면 일생 동안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닌 것 같다.

그렇듯 소년등과에서 대기만성까지 잘나가다 사마중달의 가르침,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라’를 가벼이 여겨 비참한 최후로 인생을 마감했던 대표를 들라면 선뜻 떠오르는 이가 중국 전국시대 백과사전 격인 <여씨춘추>를 펴냈던 ‘여불위’다.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까지 큰소리 쳤던 그였지만 사마의보다 한참을 먼저 살았으니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겠지만. 장사로 큰돈을 벌었던 여불위는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진나라 왕가의 자초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영락없는 벤처투자. 결국 자초가 귀국해 장양왕이 되자 여불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장양왕의 태자 영정(이 사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란 기록도 있다)이 진시황제가 됐다. 여불위에겐 ‘물러나야 할 때’였지만 그는 그러지 아니했고 결국은 진시황으로부터 ‘자살을 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세상의 일이 모두 그러하니 소년등과든 대기만성이든, 소년등과에 대기만성까지가 함께이든, 한평생을 올곧게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일까 가늠조차 안 되는 것이다. 그래그래, 그러니까 그나저나 다 좋으니 늘그막에 감방 가는 그런 인생만큼은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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