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밤과 아침
매일 아침에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나는 아침이면 눈을 뜬다. 지금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눈을 뜬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누군가 나를 깨웠을까? 아니면,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인가? 내가 아침에 거뜬히 일어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어제 밤에 잠을 잤기 때문이다. 밤이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한 휴식기간이다. 밤이 없는 아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한 유대 시인이 우주창조와 인간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창세기’ 1장 남겨놓았다. 그(녀)는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잡혀온 시인이다. 시인은 바빌론 도시 한 복판에 세워진 바벨탑도 보고 그 웅장함에 놀았다. 그는 또한 유프라테스 강 너머에 펼쳐진 광활한 초원과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보고 신비감에 도취되었고 밤하늘을 가득히 수놓은 별들을 보면서 감탄하였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시각각 시절을 쫓아 등장하는 별들을 보고 시를 한 수 남겨놓았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맨 처음에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다.” 시인은 7일 동안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이 시를 통해 신은 매일 매일 다른 것을 창조하였다고 고백했다. 그에게 하루는 어제와 구별된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아침과 밤이다. 그는 매일 매일 창조행위를 나열한 후, 항상 다음과 정형화된 문구로 끝을 맺는다. “저녁이 되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첫째 날.” 일반적으로 아침이 먼저 등장하고 저녁이 그 다음 나오는데, 그의 문구를 이 순서를 바꿨다. 저녁은 그 다음 날 아침을 탄생시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저녁이란 잠을 통해, 아침엔 새로운 날을 맞이하겠다는 쉼과 다짐의 시간이다.
모든 생물들은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한 의례가 있다. 바로 ‘잠’이다. 우리가 수면상태에 들어가면, 숨이나 뇌 기능 등 몇 개를 제외하고 모든 감각들이 정지된다. 아침과 새날을 위한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해, 그 전날 밤, 우리는 눈을 감는다. 아니 눈이 감긴다. 눈을 감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고, 잠을 자지 않고는 새날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뜬 눈으로 밤을 새면, 그 다음 날은 ‘밤’의 연속이다. 몸은 눈을 감고 잠을 통해, 힘을 회복하라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잠은 유한한 인생, 순간을 사는 인생에 허락된 신의 선물이다. 잠을 자지 않는 존재는 좀비이거나 신이다. 신은 잠이 필요 없는 존재다. 인류 최초의 도시 우룩을 건설한 길가메시는 영생을 찾기 위해, 죽은 자만이 갈수 있다는 우여곡절 끝에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그 곳에 인간이지만 영생을 살고 있는 우트나피쉬팀이 있기 때문이다. 길가메시가 그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우트나피쉬팀은 영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을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길가메시에게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눈을 뜨고 있으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알려준다. 바로 그 시간 극도로 피곤한 길가메시를 지배하는 것은 잠이었다. 잠이 길가메시를 엄습한다. 그는 7일 동안 쉬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잠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시켰고, 그는 짧은 자신의 삶을 통해, 영원히 남길 업적이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아침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새날을 선물한다. 사실 새날은 어제 밤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해가 떠오르는 새벽엔, 위대한 자신을 만들기 위한 여정 위에서, 그 날 해야 할 일을 완수하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어제 밤이다. 그 다짐은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망각하는 깊은 잠을 통해 완성된다. 내가 이른 아침에 있어야 할 장소가 있다. 바로 '단'壇이다.
'단'은 중국황제가 제사를 드렸다는 북경의 ‘천단天壇’이나, 이스라엘 엘리야가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예루살렘이 아니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해 정성스럽게 마련한 내가 일어난 바로 그 장소다. 이 장소가 내게 천단天壇이다. 천단은 내가 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위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내가 매일매일 사는 바로 이 곳이다. ‘이곳’이 그리스의 델피신전이나 로마의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보다 거룩한 이유는 내가 그렇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는 매일매일 내게 주어진 삶의 위대한 여정을 위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최적의 삶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오늘’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시간을 통해, 나를 혁신하기 위한 절대절명絕對絕命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감았던 눈을 뜬다. 오늘도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고, 그 장소로 간다. 그 장소는 공부방에 ‘정 가운데’다. 나는 정 가운데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방석을 놓았다. 방석은 가로-세로 65cm 공간이 특별하다는 표시다. 이 방석은 매일 아침 그날의 임무를 찾기 위해 묵상하는 천상의 카펫이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도 무릎을 꿇고 메카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이마를 땅에 댄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스스로 상기한다. 무슬림들의 카펫이나 나의 방석이나, 일상의 공간을 거룩한 공간으로 만드는 '단'壇이다.
'단'壇은 내가 있는 바로 이 곳이다. 그래서 한자 '단'壇옆에 흙 ‘토’土가 붙었다. 단은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 즉 집, 침대, 책상, 직장, 그리고 지하철이나 버스, 혹은 자동차다. 이곳이 바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단'은 또한 밤을 보내고 아침 해가 돋을 무렵(旦), 나를 훈련시키는 공간이다. 이곳은 특정한 공간으로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나의 열망을 찾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回) 공간이다.
4. 테멘temen과 테메노스tememos
기원전 7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에 91m나 되는 웅장한 제단을 만들었다. 이곳은 다른 곳과 구별된 장소다. 고대 수메르어에 ‘다른 장소로부터 구별되고 잘라진 장소’란 의미로 ‘테멘’temen이 있다. ‘테멘’이란 수메르어는 그림문자에서 시작하였다. 이 문자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90도로 돌려야한다. 그러면 글자 의미가 나타난다. 글자 밑에 있는 사선은 땅을 의미하기도 하고, 특별한 지역을 의미한다. 그 곳 위에 우주와 사방을 나타내는 네모를 그렸다. 네모의 중간에 선이 하나 그려져 있다. 이 선을 사방의 중심이자 우주의 배꼽을 의미한다. 이 건물은 너무 커서 그 꼭대기가 구름을 뚫고 하늘에 닿았다. 오늘날 고층건물을 의미하는 ‘스카이스크레이퍼’skyscraper 라는 영어단어의 기원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이 제단을 ‘에테멘안키’e-temen-an-ki라고 불렀다. 에테멘안키는 수메르어로 ‘하늘과 땅이 만나 하나가되는 단이 있는 장소’란 의미다.
제단을 의미하는 ‘테멘’이란 단어와 개념은 지중해 전역에 수출되었다. ‘테멘’은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 ‘왕이나 사제를 위해 다른 땅과 구별되어 잘라진 땅’ 혹은 ‘신을 위해 구별된 신전, 거룩한 숲이나 경내’를 의미한다. 그리스 아테네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를 ‘히에론 테메노스’ 즉 ‘거룩한 테메노스’라고 불렀다. ‘테메노스’는 또한 신의 신탁을 받는 델피 신전의 제단을 위미한다. 소크라테스는 테메노스에서 받는 신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 깊이 보는 수련을 시작하였다.
5. 당신은 당신만의 '단'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좌정坐定한 이 방석은 다른 장소와는 구별된 나의 단壇이다. 이곳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가 세웠다는 바빌론의 ‘에테멘안키’보다 거룩하고, 델피신전의 ‘테메노스’보다 신비롭다. 나는 이 단에서 나를 바라보고, 내가 가고자하는 위대한 여정위에 있는 나를 점검한다. 당신은 그런 방석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잠을 깨워 새벽을 맞아하게 수련시킬 단을 세운 적이 있습니까?
그림 1.
바벨탑 (1553년)
피터 브뤼겔 (1563)
그림 2.
네부카드네사르 2세의 ‘바벨탑’ 청사진
쐐기문자 ‘에테멘안키’가 왼편 네모난 박스 첫줄에 써있다.
그림 3
해변가 수사 (1808년)
카스파 다비드 프리트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