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연재를 시작하며,
생각과 말과 행위는 하나다. 말은 생각의 가감 없는 표현이며, 행위는 말이 구체화된 표시다. 글은 그 사람의 진정성을 담고 있는 행위로, 그 글을 읽는 사람의 생각과 만나 자신만의 편견, 나태, 그리고 착각을 깨우친다. 연재를 제안 받았을 때, 나는 글들을 내가 가고자 하는 숭고한 고지를 향한 수련의 과정으로 삼고 싶었다. ‘수련’이란 생각-말-행위를 일치시키려는 분투다. 수련은 인간의 각자 마음속에 숨어 있는 ‘위대함’이라는 고유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북돋기 위한 연습이다. 태권도 수련과 비교하자면, 하얀 띠에서 시작하여 노란 띠를 지나 파란 띠로 가는 과정이다. ‘위대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이 수련엔 네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자신이 감추고 싶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직시(直視)’다. 자신이 수정해야 할 모습을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면, 그 안에서 ‘소홀’한 모습을 발견한다. 세 번째 단계는 ‘고백’이다. ‘고백’이란 자신의 과거 모습을 개선하려는 의지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말이다. 수련의 마지막 단계는 ‘연습’이다.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려는 노력이 연습이다. 나는 ‘수련’이란 글을 위에서 언급한 네 단계를 각각 일곱 꼭지씩 28개 글을 쓰고 싶다. ‘수련’이란 글은 고유한 내 자신을 찾는 여정이다. 독자들로 이 여정을 통해 자신에게 어울리고 멋진 고유한 자신을 발견하길 바란다.
도장(道場)
나는 어렸을 때, 태권도 도장(道場)에 2년 동안 다녔다. 도장에 다니기 위해서는 몇 가지 먼저 해결해야 할 절차가 있다. 먼저 집에서 가까운 태권도장을 찾아 사범(師範)을 만나는 일이다. 그 사범은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후반 청년이었다. 그는 나에게 몇 가지를 요구했다. 태권도를 배우기 위한 선결조건들이다. 태권도복을 완벽하게 갖추어 입고, 일주일에 세 번, 월요일·수요일·금요일 오후 5시에 정확하게 도장에 준비해 기본자세를 취한 채 서 있어야 한다.
태권도 수련의 시작은 완전 출석이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기 위해서는 태권도 도장에 가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일과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 도장에 가지 않을 이유는 매일 수없이 등장한다. 내게 가장 부자연스러운 행동, 말하지 않기, 가만히 서 있기, 팔 쭉 펴기, 다리 들어올리기··· 이 행동들은 내가 평상시 하지 않는 이상한 행동들이다. 내 결심과 수련이 소홀해지면, 시간이 지나면서 도장에 가지 않을 시급한 이유가 더 많이 등장한다. 수련생들 십중팔구는 노란 띠에서 포기한다. 그러나, 수련시간을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두고 지킨다면, 수련은 수련자에게 반드시 보답한다. 검은 띠로 가야 내가 스스로 유유자적하고 타인을 보살피며, 절제할 능력이 생긴다. 스스로 행복한 인간이 된다.
2. 시간과 장소
태권도를 배운다는 것은, 다른 배움과 마찬가지로, 나를 변화시키고 내 정체성을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이다. 수련생은 수련시간과 장소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사범은 무엇보다도 늦게 오는 수련생을 꾸짖었다. 수련생이 시간을 지킨다는 행위는 자신이 그 시간에 무엇을, 왜 하는지 알고 있다는 표시다. 수련은 일상적으로 흘러가 버리는 양적인 시간으로부터 탈출하는 연습이다. 빅뱅이 일어났다는 137억년 전이나, 이 글을 읽기 시작한 5분 전이나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그 과거의 길이는 항상 동일하다. 과거의 시간들은 아무리 까마득한 옛날이라 할지라도, 순간(瞬間)일 수밖에 없다. 수련은 자연스럽게 하염없이 흘러가는 물과 같은 시간을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멈추게 하는 행위다. 일주일에 세 번씩, 수련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행위는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리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간절한 마음이며, 시간의 소중함을 포착하여 질적으로 다른 순간들로 만들겠다는 의지다.
태권도 도장은 상가건물 지하에 위치해 있었지만,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이 어디에 위치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곳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장소를 남다른 곳으로 만든다. 그것은 나를 수련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시킬 특별한 공간이다. 그곳은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이며, 붓다의 보리수 아래다. 그곳은 무함마드가 자신의 임무를 묵상한 히라(Hira) 동굴이다. 도장은 범인을 위대한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의 장소다. 도장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위대한 임무를 깨닫고 힘을 얻는 용광로다.
무슬림들은 일생에 한번은 사우디아리비아에 있는 ‘메카’로 몸소 가서, 그곳을 경험해야 한다. 그들은 이 여정을 '하지(hajj)'라고 불렀다. ‘하지’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구별된 거룩한 경내(境內)로 진입하는 용기다. 무슬림들은 메카로 들어가 '라마단(Ramadan)'이라는 종교의례를 행한다. ‘라마단’은 원래 이슬람 월력으로 1년 중 가장 뜨거운 아홉 번째 달에 해당한다. ‘라마단’이라는 단어는 ‘(불로) 태운, 뜨거운’이란 아랍어 형용사 ‘라미다(ramida)'의 명사형이다. 무슬림들은 매년 200만명 정도가 섭씨 45도 이상을 유지하는 가장 더운 날에 메카를 찾는다. 자신의 과거를 ‘불로 태워’ 연소시켜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다.
3. 도복(道服)
수련생은 도복(道服)을 정해진 규정대로 입어야 한다. 수련생(修鍊生)은 하의를 먼저 입고, 상의는 하의 위로 늘어뜨리며, 그 위로 흰 띠를 허리에 동여매고 사범이 등장할 때까지 미리 마음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나는 집이나 학교에서 입던 일상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야 한다. 도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행위는 내가 일상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 준비한다는 마음가짐이다.
인간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전이하는 과정을 표시하는 수단이 바로 ‘옷을 갈아입기’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과거와의 결별이며 미래와의 약속이고, 현재와의 투쟁이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내가 열망하는 미래의 품위를 나타내고 있는가? 남들의 눈치와 체면에 휘둘리는 사람은 남들의 기준에 맞게 자신의 옷을 재단하여 몸에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는다. 그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진부하다. 자신의 고귀한 정신을 담을 수 있는 간결한 옷을 우리는 ‘명품’이라고 부른다.
무슬림도 메카가 들어가기 전에 몸을 정결하게 유지하고 특별한 도복을 입는다. 무슬림들의 도복은 이음매가 없고 바느질한 흔적이 없는 흰색 옷이다. 무슬림들은 라마단 한 달 동안 도복을 입고, 신이 자신에게 맡긴 임무를 새롭게 깨닫고 승복한다. 이슬람에서 라마단 수련기간 동안 무슬림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아랍어로 ‘이흐람(ihram)'이라고 불렀다. ‘이흐람’의 어근인 *h-r-m은 셈족어로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쓸데없고 부차적인 것을 파괴하다’라는 의미다. 무슬림들은 ‘흰색 옷’을 입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유기시키겠다는 결의를 표시한다. 무슬림들의 이흐람 옷은 장례식에 자신이 입을 옷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옷을 입고 죽음을 미리 경험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다짐한다.
4. 도장수(道場樹)
도장(道場)은 ‘도장수(道場樹)'의 준말로,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에 있었던 보리수를 의미한다. 후에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장소를 ‘도장’이라고 불렀다. ‘도장수’는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보디 만달라(bodhi mandala)'라를 한자로 번역한 표현이다. ‘보디’는 ‘수련을 통해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알지 못했던 진리를 새롭게 인식하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 깨달음의 대상이 ‘만달라’다. 만달라는 우주의 중심이며 세상의 축이다. 만달라는 사방으로 펼쳐진 정사각형 안에 존재하는 한 점으로 흔히 ‘원형’으로 표시한다. 그 점은 수련하는 사람이 안주해야 할 마땅하고 유일한 처음이다. 수련자는 도장 수련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인식하고 그 유일한 점 속에 진입하여 스스로 유유자적한다. 그가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5. 위대한 개인
이집트 피라미드는 2.5t 바위를 200만장 정도 쌓아올려 건축되었다. 바위들이 모두 자신의 위치를 알고 한 장 한 장 쌓아올려져 4500년이 지난 오늘도 감동을 선사한다. 위대한 국가 건설의 초석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 있고 자신의 고유임무를 발견하고 몰입하는 위대한 개인이다. ‘자기수련’의 첫 번째 관문은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직시(直視)’다. 타인에게 감추고 싶은 나의 모습,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다. 매주 월요일 아침, 여러분을 찾아가는 ‘수련(修鍊)'이란 글은 우리 모두 가슴속 깊이 숨어 있는 ‘보디 만달라’를 찾기 위한 지면도장(紙面道場)이다. 나는 앞으로 실을 28개 글을 미궁에 숨어 있는 나의 보물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들은 스스로 행복하고 자신을 대견해 할 수 있는 숨겨진 보물을 찾아가는 순례(巡禮)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되기를 스스로 열망하는가?’ 이 거룩한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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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1962)는 누구인가?
미국 하버드대에서 세계 최초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동시에 전공, 박사학위를 받으며 국제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B.C. 6세기 다리우스대왕이 쐐기문자로 기록한 베히스툰비문의 독보적인 권위자이며, 구약성서에 쓰인 고대 히브리어와 아랍어, 신약성서의 고대 희랍어 등 고대 언어를 연구한 고전문헌학자로 학문적 연구결과물을 낼 때마다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03년부터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이들 종교를 탄생시킨 고대 오리엔트 문명 및 헬레니즘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심연' 등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현 시대 대표적 인문학자이자 지성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