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된 것일까?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 표기된 것은 1395년 9월 태조실록에서 볼 수 있다. “대묘와 새 궁궐을 준공하고 동문은 건춘문, 서문은 영추문,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다고 서술 하고 있으며, 세종 8년(1426년)에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지어 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울러 세종실록(세종 10년,1428년)에는 광화문에 종을 매달아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종을 치게 하여 백성들의 원억(冤抑-누명을 써서 원통하고 답답함)한 일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고 세종 16년(세종실록,1434년)에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 달도록 하였으며 1434년 3월에 광화문이 완성된 것으로 실록에는 기록되고 있다.
현대의 우리들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는 대통령 중심제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조선의 국왕은 오늘날의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존재였다. 현대의 정부는 입법부․행정부․사법부 등 삼부(三府)로 나누어져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더불어 조선의 국왕은 이 같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 하여 백성들의 뜻을 받들어 애민정신에 입각한 참다운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맹자는 국왕의 정의에 대해 “덕(德)으로 인(仁)을 행하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광화문에서 상소를 올려 시시비비를 국왕에게 전했으며 국왕은 광화문에서 무과시험을 치르게 하고, 군사를 지휘하며, 곡림(哭臨-죽은 신하를 몸소 조문함)하는 등 민심은 천심이라 하여 백성들의 뜻을 받들어 민본주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조선의 제4대 국왕인 세종대왕 시 대간(사헌부,사간원)에서 상소하길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천심에 순응하고 민심에 좇을 따름이다.”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 보며, 하늘이 듣는 것도 우리 백성이 듣는 것으로부터 듣는다.’ 하였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민심은 천심이라 하여 백성이 우선인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참된 협치(協力的 統治)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문헌으로 전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료를 통해 우리들에게 많은 경종과 시사점을 남겨주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가는 우리들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상호 공유하는 도덕과 규범을 실천해야 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태도와 자질을 더욱 깊게 갖추어야 한다.
아울러 사회현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타인과 집단구조 내에서 상호 협력하는 사회적인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추구하고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시민의식이 함양된 민주시민으로 거듭 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우리는 차가운 이성이 아닌 따뜻한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이 협력과 나눔을 회복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협력이 가능한 사회, 호혜적 규범과 질서, 상호간의 사회적 신뢰가 있는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