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슨호의 건조비용은 5조원 대에 이른다. 미 해군의 최신형 항공모함 ‘제럴드 R. 포드호’의 건조비는 무려 15조원 대에 달한다. 한국의 연간 국방예산이 40조원대인 것과 비교하면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항공모함은 철강재로 건조된다. 구체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군함의 경우 최첨단 장비가 탑재되는 만큼 전체 건조비에서 철강재 구매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투함은 5~10%, 항공모함은 2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제럴드 R. 포드호를 비롯한 미국 군함의 건조비는 과연 최저 비용을 들여 최대 효과를 달성한 적정 수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미국은 자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철강재가 상무부의 수입허가 발급제 대상이다. 철강재를 해외에서 수입하려면 상무부로부터 수입 면허를 받아야 한다.
또한 미국 정부는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입산 철강재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통상수단을 활용해 반덤핑·상계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철강재 가격 경쟁력이 한·중·일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져 정부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전 세계 국가들에 조치중인 수입규제 392건 가운데 철강제품은 202건에 달할 정도다.
미국 정부조달정책은 미국 내에서 생산되고, 미국산 재료가 50% 이상 사용된 물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즉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n)’를 원칙으로 한다. 특히 미국 정부조달시장의 약 70%를 차지하는 국방부의 경우, 연방구매규정(FAR)에 따라 무기와 미사일, 선박, 비행기, 통신·탐지·레이더 기기 등의 품목은 상호 국방조달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의 기업에 대해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 비양허 품목의 입찰가격에 50%의 가격상향조정을 의무화함으로써 참여기회를 사실상 차단하고 있다.
응찰할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철강재의 경우 외국산 가격이 자국산 보다 25% 이상 싸면 입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미국 업체가 공공건설에 조달할 철강재 가격을 외국산 제품보다 24% 비싸게 써내면 계약을 따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군함 건조에 공급한 미국산 철강재는 외국산보다 비싼 가격에 계약한 것이다. 제너럴 R. 포드호의 경우 외국산 철강재를 공급받았다면 2조8000억원의 구매비용을 2조1000억원 이하로 낮출 수 있었다. 7000억원은 다른 군함 1척을 건조하거나 항공모함에 탑재하는 전투기 여러 대를 추가 구매할 수 있는 큰 액수다. 국가안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하지만, 과연 미국 국민들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갈지 의문이다.
비슷한 상황은 공공부문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주 정부는 1990년대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를 건설할 때 바이 아메리카 조항 때문에 외국산 보다 23% 높은 가격으로 응찰한 미국 철강사와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철강업체들은 횡재를 했지만, 캘리포니아 납세자들은 4억 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을 추가 지불했다. 현재의 원·달러 환율로 계산해도 약 4553억원이니, 당시 환율로는 더 큰 돈이었다. 이러한 세금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납세자들이 얻은 이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와 같은 사례는 미국에 엄청나게 많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해외 철강사들에 대해 통상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1962년 무역확대법(Trade Expansion Act of 1962) 232조에 의거한 행정명령을 통해 상무부가 특정품목, 이중 철강재에 대해 국가안보 위협 여부를 조사 및 평가하고 대통령이 최종 승인 하면 수입쿼터를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 조사 결과 최대 45%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수요 산업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수입산보다 25% 비싼 가격의 철강재를 구입해 만든 미국산 제품들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국 기업을 위한다는 트럼프 정부의 막무가내식 정책들이 정작 자국기업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공세가 매섭다. 하지만 국민의 지지를 담보하지 못한 강공책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우리 기업들도 잠시 움츠리되 겁낼 필요는 없다. 바람을 피하면서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를 발굴하는 데 주력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