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김남길은 이 작품에 대한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됐다. 어느 날, 문득 벌어진 일이었다. 작품과 캐릭터가 그의 마음을 관통한 것이다.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달라진다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혼자 시나리오를 읽고 펑펑 울 정도”였던 그는 그렇게 ‘어느날’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의 영혼을 보게 된 남자 강수(김남길 분)와 뜻밖의 사고로 영혼이 되어 세상을 처음 보게 된 여자 미소(천우희 분)의 이야기를 담은 ‘어느날’에 대한 김남길의 변화를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었다.
- 특별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다. 당시 ‘살인자의 기억법’을 촬영하던 중이었는데, 연쇄 살인마 역이라서 그랬는지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의 시나리오가 감성적으로 와 닿는 거다. 안쓰럽고 또 아프게 느껴졌다. 펑펑 울고 촬영장에 갔는데 원신연 감독님이 ‘껍데기 같은 눈이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감성적이냐’고 타박할 정도였다. 그래서 감독님한테는 ‘전 이제 착하게 살래요’하고 투정부리기도 했었다. 관객들에게도 이런 정서를 전달하고 싶었다.
- 개인적으로 저는 소재의 다양성에 갈망을 느끼고 있다. 현재 영화계는 이른바 ‘천만짜리’ 영화들만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천만 드는 영화들이 좋은 영화일까? 물론 상업영화를 좋아하지만 이런 다양성 영화들 역시 좋아하고 즐긴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우리가 더 많은 장르와 소재를 접하기 위해서는 이런 영화들도 잘 돼야 한다.
이전부터 쭉 연기에 대한 갈증에 관해 언급했었다. 힘을 뺀 연기를 하고 싶다고. ‘어느날’은 그런 갈증을 풀어주는 작품이었을까?
- 갈증을 풀어주는 작품 중 하나였다. 지나가는 작품인 셈이다. 이 영화를 소홀하게 대했다는 게 아니라 작품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영화를 찍고 1년 정도 있다가 개봉을 하니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민망해지는 거다. 개인적으로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번 작품은 확실히 몸에 힘을 뺀 느낌이었다. 판타지적 상황과는 달리 연기는 매우 현실적이었는데
- 중요하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직업적인 부분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아니라서 치중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만 말투는 평상시 말투 같은 걸 쓰면서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인물처럼 보이려고 했다.
문어체적 대사도 많았는데 확실히 대사 톤도 현실적이었다
- 저의 모습을 투영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판도라’ 재혁이나 ‘어느날’ 강수는 저와 닿아있는 부분이 많다. 다정다감하거나 간지러운 표현이 안 돼서 툴툴거리기도 하는데 그걸 영화에 표현하면 덜 오그라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판도라’처럼 감정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속으로 품어야 하는 연기였다.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
- 맞다. 오히려 감정이 세면 표현은 더 쉽다. ‘나 감추고 있어’ 식의 연기가 힘들었다. 강수를 연기할 땐 슬픔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아픔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일상적으로 지내면서 아픔이 있는 공간에서만 연민, 죄책감을 꺼내려고 했다. 트라우마를 느낄 때도 담담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정말 보통, 일상처럼.
천우희와 멜로가 아니기 때문에 더 좋았다
- 처음 (천)우희와 영화를 찍는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격정 멜로냐’고 했었다. 둘 다 강한 캐릭터를 해서 그랬었던 것 같다. 제가 하도 아니라고 하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멜로겠지’라고 했었는데 완전 아니었던 거지. 하하하. 그런 측면에서 신선하다고 하시기도 한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녀가 붙으면 멜로 장르의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우리 영화가 다른 장르로 풀 수 있다는 하나의 제시를 한 셈이다.
영화의 엔딩을 보며 강수는 상처를 극복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더라
- 잘 살겠죠. 그건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도 있고,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혼자 지낼 수도 있고, 삶이 힘들어서 죽을 수도 있는 거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강수에게 많은 짐을 지운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의지했던 미소마저도 결국 강수에게 짐을 떠민 것 같아서
-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강수 입장에서 정말 하기 싫은 선택이었다. 미소의 건강이 안 좋아지니까 타이밍 적으로 그의 죽음을 함께 해주는 건 안 되냐고 제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나리오의 시작점 자체가 강수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시더라. 존엄사에 관해서는 정말 큰 무게감을 느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대신 직접 보여주지는 말자고 했다.
차기작은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어느날’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다
- 연쇄 살인마 역이다. 소시오패스도, 사이코패스도 아닌 의료적으로 명명 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셨다. 분장을 지운 조커 같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감독님이 히스 레저 패널을 선물해주셨는데 만날 그걸 들여다보곤 한다. 강수는 감정을 잃어가는 캐릭터라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감정 자체가 없는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