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영화 ‘보통사람’(감독 김봉한)은 장혁의 필모그래피에 또 다른 변화, 또 다른 이면을 선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 냉혈한 안기부 실장 최규남 역을 맡아 열연했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이 아닌 “지워나가는 연기”로, 새롭게 관객들을 마주하게 된 장혁과 ‘보통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최규남의 옷을 벗어버린 상태에서 ‘보통사람’을 보니, 막막하고 또 먹먹하다는 느낌이 든다. 80년대 어른들은 어떻게 저 시절을 버텨온 걸까 하는 마음이다. 극 중 성진(손현주 분)의 아들이 그런 이야길 하지 않나. ‘가만히 있으면 빨리 끝난다’고. 그 말이 너무도 먹먹하더라.
- 감독님과 함께 이야기한 것은 규남이 80년대, 시대적인 시스템을 상징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점이었다. 안타고니스트로서 거대한 벽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의 전사가 나와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감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은 있었다.
감정을 지워나가는 연기임에도 강조해야 할 부분들은 분명 있었다
- 그렇다. 규남이 시국선언문을 들고 교수님을 찾아가는 장면은 감정적으로 격앙된 부분이었다. 자신의 은사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는 장면에서 이 인물의 변천사가 선명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겼다. 시대가 가진 안타고니스트지만 통제하지 못한 시대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감정을 덜어내고 연기를 하는 것이 더 섬뜩하게 느껴지더라
- 규남 역에 새로운 느낌을 더하고 싶었다. 사실 말투만 보자면 친근하다고 여길 수 있다. 안기부 실장을 지우고, 80년대 시대를 지우고, 강압적인 얼굴을 지우고 나면 오히려 다정한 말투라고 생각한다. 애를 어르고 달래는 말투라고 할까? 제가 저의 아이들에게 하는 말투와 비슷하다. ‘맘마 먹었어요?’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하니까. 오히려 이런 걸 재편성하고 보니 무서운 말투처럼 느껴지더라.
한때는 연기 스타일이 ‘추노’ 대길이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 제가 잘 구사하는 것 혹은 특유의 색깔을 뺄 필요가 있을까? 색깔이 한 가지밖에 없다면 다양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잘할 수 있는 걸 버릴 필요가 있을까 싶다. 물론 견제하고 만들어가는 자세는 필요하지만, 저의 장점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 다른 장르와 캐릭터의 변화로 조금씩 벗겨지는 것 같다. ‘추노’ 대길이는 거친 느낌이고 ‘보이스’ 진혁 역시 비슷한 선상에서 만들어 가는 거다. ‘뷰티풀 마인드’라는 작품에서는 대길이를 꺼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성향이 비슷하거나 잘하는 분야가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을 견제하면서 점점 더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는 현재진행형(ING) 배우니까.
최근작을 지나면서 그런 평가 자체는 흐려진 것 같다
- 어쨌든 저의 성향 자체는 비슷하고, 제가 느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말투와 톤을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예 피해간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고. 보통 이런 변화가 3년이나 5년 주기마다 바뀌는 것 같다. 장혁이라는 사람 자체에도 변화가 일어나니까.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 같다. 옆에서 몰아붙인다고 해서 갈 생각은 없어요. 천천히 가고 싶은 거다.
‘보통사람’의 출연 계기는 배우 손현주 때문이라고 들었다
- 현주 형이 출연한다고 해서 출연하게 된 거다. ‘보통사람’ 시나리오를 보고 선택한 게 아니라 ‘야, 요즘 현주 형 뭐하냐?’고 물었는데, 이 작품을 시작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저도 시나리오를 보게 됐고 안타고니스트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여서 이 작품에 합류하게 됐다.
손현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나 보다
- 선배로서의 롤모델이었다. 드라마 ‘타짜’로 처음 만났는데 당시 제가 30대 초반, 형은 40대 초반이었다. 지금의 제 나이쯤? 어쨌든 당시 선배를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많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저도 저런 선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배우로서도 마찬가지다. 맛깔나는 배우라는 느낌이다. 당시 ‘타짜’에서는 많이 만날 수 없었는데, 이번 작품에서 연기 호흡을 제대로 맞춰보고 싶었다.
한때는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40대가 된 지금, 옛날이 그립지는 않나?
- 20대일 때도, 30대일 때도 저는 항상 40대가 되고 싶었다. 젊을 때는 열정이 넘쳤는데 경험이 축적된 사람에 비해서 한없이 모자란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컨대 제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에 반해 나이가 있는 사람은 담백한 한마디를 던지는 느낌? 다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게감 있는 나이가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찾아온 변화가 있는 것 같다
- 계기 같은 건 없고 그냥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예전에 해오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다른 질감을 내는 거다. 제가 전인권 선배의 ‘제발’이라는 노래에 꽂혔던 적이 있었는데 최근에 부르신 ‘제발’과 80년대에 부르신 ‘제발’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더라. 톤 자체가 달랐다. 저변에 무언가 깔려있는 느낌이 들더라. 제 연기 역시 마찬가지다. 계기가 생겼다기보다는 오늘, 내일이 반복되면서 나도 모르는 변화가 생기고 예전 방식 등이 자연스럽게 변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