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이청아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던” 그가 순식간에 낯빛을 바꿔 나타난 것이다.
지난 1일 개봉한 영화 ‘해빙’(감독 이수연)은 이청아의 새로운 카테고리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히 살인의 비밀에 휘말려 점점 두려움에 휩싸여가는 내과 의사 승훈(조진웅 분)과 수상쩍은 주변인물들의 팽팽한 심리를 그린 작품 속에서, 이청아는 미심쩍은 언행으로 주인공 승훈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토박이 간호조무사 미연 역을 맡았다.
그야말로 변신이었다
‘늑대의 유혹’을 만나서였을까?
-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이전에는 많은 장르, 카테고리 안에 있었는데 ‘늑대의 유혹’ 이후 착한 캐릭터들을 맡게 됐다. 한 6년 정도를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맴돈 거다. 다른 걸 해보자 싶어서 일일 드라마 속 처연한 캐릭터도 맡아보고, 푼수떼기 역할도 해봤는데 결국은 밝은 작품 속, 캔디 같은 이미지가 지워지질 않았다.
근래 들어서 이미지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 같다. 드라마 ‘뱀파이어 탐정’도 그렇고
- ‘뱀파이어 탐정’ 제작보고회 때 ‘악역은 처음이시죠?’라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 미연이 악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제 기준에서 변화의 시작은 ‘해빙’이었다. 그래서인지 미연에게 조금 미안하더라. ‘네가 먼저인데 말할 수 없었어. 미안해’라고 외치곤 했다. 하하하. 미연이 있었기에 뱀파이어 끝판왕인 요나를 연기할 수 있었다.
대중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어두운 정서를 좋아하는 것 같다
- 다 좋아하지만 다크한 정서의 작품을 좋아한다. 하지만 관객들이 가진 첫인상을 떨치기가 힘든 것 같다. 어떤 첫사랑의 이미지처럼 굳어지는 것 같다. 미연을 연기할 때 그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 캐릭터를 이용해 반전을 주면 좋을까? 아니면 완전히 버리고 들어가는 게 좋을까 하고.
그런 의미에서 미연은 어땠나? 캐릭터에 몰입하기 어렵진 않았나?
- 자기랑 딱 맞는 배역을 만나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다만 미연이를 보면서 저의 모습을 조금씩 차용하기로 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든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는 모습이랄까? 침묵을 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있다. 그런 걸 미연에게 가져오려고 했다. 특히 승훈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누군가 ‘침묵을 깨려고 애쓰는 사람이 약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딱 미연처럼 느껴졌다.
미연에 대해 많은 것을 분석하고 파헤친 것 같다
- 그런 디테일을 심어두는 것에 재미를 많이 느꼈다. 미연이는 병원에서의 모습이 자기일까, 아니면 병원 밖 모습이 자기일까?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심층적인 면까지 고민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겉으로 태가 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미연을 보며 디테일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다. 매너리즘을 겪는 간호조무사의 모습이 실감 나게 느껴지더라
- 다행이다! 하하하. 저는 모나거나 별나면 다 외워두는 편이다. 나중에 써먹으려고! 예전에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의사·간호사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직업적 익숙함이랄까? 저는 당장 죽을 것같이 아팠지만, 응급실엔 정말 위급한 환자가 많지 않나. 그때 겪은 미세한 부분들이 기억이 났다. 친절하면서도 감정을 배제한 연기 톤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작들의 연기와도 다른 톤을 보여준 것 같다
- 전에는 제가 로맨틱 코미디를 많이 하지 않았나. 그 장르는 카메라워킹에도 특징이 있다. 인물의 얼굴을 집중하고, 인물 역시 카메라에 집중해야 한다. 정확하게 한 컷, 한 컷을 짚어주는 거다. 그런 연기에 익숙해져 있을 때 ‘더 파이브’라는 영화를 만났다. 이전에는 120신을 찍는다면 제가 100신이 나왔는데, ‘더 파이브’의 경우에는 120신 중 20신에 나오는 상황이었다. 배우들과 함께 찍는 신이 적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고 놀랐다. 연기톤이 이상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이상했나?
- 어긋나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제가 영화 촬영장에 5일 이상만 있었더라도 배우들 전체의 연기를 보고, 제 연기 톤을 맞출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제가 주연을 맡았을 때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으니까. 미처 주변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점차 작품들을 해가면서 함께 맞춰가는 방법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이번 ‘해빙’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
-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이었다. 진웅 선배님이나 신구 선생님을 보면서 내가 발음이 뭉개지더라도 자연스러운 소리가 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너무 연기하는 느낌이 나는 걸 경계했다. 예컨대 승훈의 집에 찾아가 화를 내는 장면도 그랬다. 영화 속 인물이 화를 내는 것과 실제 인물이 화를 내는 건 다르지 않나. 실제 상황에서는 약간 우습기도 하고, 횡설수설하기도 하니까.
자연스러움을 위해 특히 노력한 부분이 있나?
- 평소 저는 소심한 편이고 다른 사람들도 신경을 많이 쓴다. 하지만 미연은 그렇지 않은 캐릭터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전혀 눈치를 안 보려고 했다. 현장에서도 그 캐릭터처럼 보이고 싶었다고 할까. 원래 성격이었다면 신발 끈을 묶더라도 선배님이 지나가시면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하는데, 미연처럼 보이고 싶어서 신발 끈을 다 묶고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항상 저를 우선시 생각한 거다. 그래서 진웅 선배님께도 더 친밀하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게 서로 캐릭터에게도 더 좋을 것 같았다. 늘 거리가 있도록 행동했다.
그래서인지 현실감은 살았다
- 아무것도 모를 때, 진짜 막 연기를 시작했을 때 더 현실적인 연기를 했었던 것 같다. 상황에 젖어 그 인물처럼 행동하는 것들이 뭘 몰랐을 때 더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미연을 연기하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왜, 이걸 버렸을까?’ 싶더라. 미연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많은 부분을 떠올렸다.
이청아의 변신에 대해 반응이 좋은데 스스로 자평하자면?
- 욕심을 안 부리는 게 어렵더라. 더 연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잘하고 싶고, 욕심이 앞설 때가 있었다. 연극 ‘꽃의 비밀’을 할 때 장진 감독님이 그러셨다. 연기를 잘하면 ‘연기 잘하네’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보다 한 수위가 높아지면 투박함을 더하게 된다고. 연기를 안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셨다. 저는 미연이 딱 그런 느낌이길 바랐다.
‘해빙’과 미연 캐릭터에 애착이 남다른 것 같다
- 제가 데뷔를 일찍 하지 않았나. 연기를 시작한 지 16년 정도 되었는데, 늘 스스로 부족하다고 자책해왔다. 기술적인 면이나 장르적인 면에서 갈증이 컸다. 단역부터 차근차근 주연까지 올랐고, 연극도 시작하며 점점 더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있다.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캐릭터에 대한, 작품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