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중국인 입맛 사로잡은’ 벌집삼겹살 김광상 사장

2017-03-24 16:40
  • 글자크기 설정

벌집삼겹살 김광상 사장[사진=인민화보 궈사사(郭莎莎) 기자]


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1990년대 미국 뉴욕에서 힘겹게 살아남으며 창업한 베이징(北京) 출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정샤오룽(鄭曉龍), 펑샤오강(馮小剛) 감독의 TV드라마 ‘뉴욕의 북경인(北京人在紐約)’이 큰 인기를 모은 적이 있었다. 그때 뉴욕의 베이징 사람들처럼 현재 베이징 왕징(望京)에는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고있다. 한류 바람을 타고 베이징에 정착한 이들은 낯선 도시에서 자신의 사업을 꾸려가는 데 여념이 없다. 한국인 김광상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왕징에 있는 그의 음식점이었다. 적당한 몸집에 오똑한 콧날을 지닌 그는 얼굴에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과거 필자가 접했던 음식점 사장님들과 달리 그에게서는 사뭇 교양인의 모습도 엿보였다. 한창 손님이 붐비는 밤시간, 그는 손님들에게 반찬이 부족하지는 않은지를 묻거나 계산대에서 주문 상황을 확인하며 분주한 모습이었다. 우리의 식사가 끝날 때쯤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감자전을 내오며 ‘한국에서 수입한 감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맛 그대로일 것’이라며 꼭 한번 먹어보라고 강조했다.
김 씨와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은 따뜻했던 어느 오후였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적당한 햇빛이 따스하게 식당 안을 비추고 있었다. 한창 바쁘던 낮 점심시간이 지나고 저녁시간까지는 아직 일러서 그런지 식당 안에는 손님이 얼마 없었다. 김 씨는 작은 딸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쪽에서 종업원 두어 명이 저녁시간을 대비해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김 씨는 벌떡 일어나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베이징올림픽과 함께 찾아온 ‘차이나 드림’
김 씨는 중국에 오기 전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경기케이블TV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기자 생활을 했다. 그러다 2002년 중국어 학습을 위해 베이징어언대학교로 파견됐는데, 처음 베이징에 왔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세관을 통과할 때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휘장을 보는 순간, 드디어 내가 베이징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어요.” 그 전에는 중국이나 베이징에 대해 ‘드문드문’ 알고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당시 그는 우다오커우(五道口)에 위치한 베이징어언대학교의 유학생 기숙사에 머물렀다. “그때는 어언대학교 기숙사의 층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어요. 많아 봤자 8층에서 10층 정도였을 거예요.” 그는 중국에서 연수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 곧바로 사직서를 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 베이징에 도착해 보니 왕징(望京)에 ‘손에 손 잡고’라는 중국어 생활정보지가 널리 배포되고 있었다. 기자 출신인 까닭에 정보에 민감했던 그는 여기서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했다. “당시 한국에선 생활정보지가 엄청 돈이 됐었죠. 여기는 한국인도 많이 살고, 사업하는 한국인도 많으니 한국어판 신문을 만들면 분명히 ‘먹힐’ 거라고 생각했죠.”
그는 이런 기대감에 부풀어 다시 중국 땅을 찾았다. 2002년 왕징역을 경유하는 베이징 지하철 13호선이 개통되며 왕징 지역이 막 떠오르려던 참이었다. 2006년에는 왕징의 인구 수가 20만명에 육박했는데 이 중에서 한국인이 대략 3분의 1을 차지했다. 왕징 인근 화자디(花家地)에는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한국 국제학교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 주변에 중의학 전문대학, 경제간부관리학원 등 교육기관이 포진해 있어 한국 학생과 학부모들이 모여들었다. 왕징의 신도시 규모가 점점 커지고 화자디의 오래된 주택에 비해 여건이 좋아지자 화자디 지역에 살던 한국인들이 점점 왕징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왕징은 공항에서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로 매우 가까웠다. 어느 새부터인가 왕징 지역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며 점점 선호도가 높아졌다. 심지어 베이징에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한국인들조차도 왕징은 베이징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은 ‘코리아 타운’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200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m2당 수천 위안 수준이었던 왕징의 집값은 1만5000위안(약 251만원)으로 치솟고 월세도 나날이 신기록을 경신했다. 상주인구가 많아지다 보니 주변 부대시설도 빠르게 갖춰졌다. 한국식당, 마트, 미용실 등도 들어오며 이곳은 점점 베이징의 ‘진짜’ 코리아 타운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김 씨가 창간한 신문 ‘벼룩시장’은 이런 호시절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신규 사업자가 입주해 오면 홍보를 위한 광고매체가 필요한 법이다. 당시는 매일 같이 쏟아지는 고객 전화를 일일이 응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당시 베이징올림픽은 중국인들에게 ‘차이나 드림’을 심어주었다. ‘차이나 드림’을 품은 사람들은 또 있었다. 중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 그리고 김광상 씨였다.
 

벌집삼겹살 김광상 사장과 가족들[사진=인민화보 궈사사(郭莎莎) 기자]


음식에 쏟는 정성이 성공의 비결
성대한 올림픽이 끝나자 스마트폰이 유행하고 전자상거래가 점점 발달하기 시작했다.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늘 고객과 많은 얘기를 나누던 김광상 씨는 언제부터인가 신문 산업이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객들의 전화 문의도 줄고, 인터넷 매체에 광고를 싣고 싶어하는 고객들이 많아졌었죠.” 왕징의 상권이 안정되자 부동산 가격도 오르기 시작했다. 치솟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한 일부 사업자들은 폐업하거나 다른 길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김 씨도 자신의 다음 사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몇몇 숯불구이 고기집이 가게를 내놓는 것을 보고 음식점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운영을 하며 종종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 문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은 여전히 높았습니다. 게다가 불고기는 한국의 전통음식이기 때문이 시장이 그리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가게를 내놓은 몇몇 한국 음식점을 둘러보고 수중의 예산과 운영비를 자세히 따져 봤다. 또 불고기 조리법도 연구했다. 어차피 베이징에는 유동인구가 많았고, 그가 점 찍어 놓은 가게 위치는 지하철 왕징역과도 가까운데다 인근 마트 및 주택가와도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결국 현재의 위치를 최종적으로 낙점했다. 이름은 ‘벌집삼겹살(중국명 ‘絕味五花肉’)’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혀 요리를 할 줄 몰랐어요.” 그는 인터넷을 통해 요리를 배우며 본격적으로 메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깃집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수한 돼지고기를 고르는 일이었다. 순이(順義)구와 허베이(河北)성이 만나는 지점에 도축장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어 실력은 서툴렀지만 우수한 돼지고기를 얻기 위해 바로 그 곳으로 달려갔다. “느닷없이 외국인이 도축장을 찾아왔으니 당연히 대부분은 거절을 했죠. 하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시식용으로 고기를 일부 가져가게 허락해 준 곳도 있었어요.” 3~4개월에 걸친 발품을 판 끝에 드디어 순신(順鑫)도축장이라는 곳에서 마음에 드는 돼지고기를 찾았다.
그는 재료에 대해 좀 더 생생하게 설명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고기를 한 덩이 꺼내오더니 말을 이었다. “이 돼지고기를 보면 껍질과 고기의 두께가 대략 2~3cm 정도 됩니다. 뼈갈비도 남아 있죠. 이 부분이 저희 집이 쓰는 고기의 핵심입니다. 이런 돼지는 보통 200~300kg 정도 되는데 고기를 구워도 그렇게 질겨지지 않죠. 어떤 가게에서는 원가를 줄이려고 비계를 일부 잘라내기도 하는데, 저희는 줄곧 살에 껍데기와 뼈가 붙어있는 고기를 고수하고 있어요.” 그는 칼로 고기를 조금 베어 보여주었다. 껍데기와 뼈가 붙은 고기는 두께가 1cm 남짓 돼 보였다. 품질에 자신 있는 고깃집만이 고기를 두텁게 잘라 쓴다는 얘기가 있다. 돼지고기에는 그 자체에 잡내가 있기 때문에, 고기를 두텁게 잘라야 잡내가 그 안에서 빠져 나오지 않아 식감이 좋아진다.
그는 주재료인 돼지고기 외에 다른 식자재도 철저하게 관리했다. 매일 동트기 전 새벽 무렵부터 차오라이완퉁(朝來萬通) 도매시장에 가서 그날 쓸 채소 등의 식재료를 직접 구입한다. “이 근처에 도매시장이 있는데 보통 새벽 3시쯤 문을 엽니다. 새벽 4시에서 5시가 식재료를 사기 가장 좋은 시간대입니다. 매일 제가 직접 가서 재료를 골라 오곤 하죠.”
 

김광성 사장이 고객들에게 고기를 구워주고 있다.[사진=인민화보 궈사사(郭莎莎) 기자 ]

김광성 사장이 가게를 찾았던 연예인들의 싸인을 소개하고 있다.[사진=인민화보 궈사사(郭莎莎) 기자 ]


음식점 운영을 위해선 경영공부는 필수
왕징의 주요 거리 양쪽으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게가 바로 한국음식점이다.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이곳에서도 모두 맛볼 수 있다.
중국인들이라면 대부분 한때 중국 전역을 휩쓸었던 인기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한국 음식을 알게 되고 또 직접 먹어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음식점은 그때부터 순식간에 중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2013년에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다시 한번 한국음식점 붐을 일으켰다. 일명 ‘치맥(치킨+맥주)’의 조합으로 치킨집들은 소위 ‘대박’이 났다. 연일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KFC의 배달원이 ‘핫윙’과 ‘치킨너겟’ 주문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한국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실시한 조사에서 한식은 중국의 옌볜(延邊), 베이징, 상하이, 홍콩 등지에서 95%가 넘는 인지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중국인들은 불고기를, 일본인들은 소갈비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식을 즐기는 중국인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선호도 조사에선 60%가 불고기, 28%가 떡볶이를 가장 좋아하고 다음으로 비빔밥, 냉면, 된장찌개 순이었다.
한식이 이처럼 해외에서 사랑받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국 드라마나 한류의 영향도 물론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음식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깔끔한 인테리어, 건강한 음식을 만들겠다는 철학, 훌륭한 서비스 같은 점들 때문일 것이다. 김씨의 음식점은 창문 외에 사면 벽이 모두 ‘광고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앞에 있는 포스터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저희 가게에서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10가지 종류의 삼겹살에 대한 소개입니다. 뒤쪽에 쓰인 효능이나 육질의 특징 같은 설명은 다 제가 하나하나 자료를 조사해서 쓴 것들입니다.” 또 다른 벽면에는 ‘술친구, 안주친구, 누구나 환영합니다. 취할 때까지 마셔봅시다!(酒兄弟, 小菜兄弟, 來吧! 不醉不休!)’라는 슬로건이 붙어있었다. 그가 직접 쓴 문구다. 가게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두 개의 나무판에는 그가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사인들이 즐비했다. 김 씨는 상기된 얼굴로 사진 속의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벌집삼겹살이 있는 건물에는 삼겹살집만 세 곳이 넘는다. 베이징 전체로 보면 수백 곳의 한식당이 있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고객의 미각을 사로잡으려면 음식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성실하게 운영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제 기자 경력과 생활정보지 광고사업 경험을 모두 음식점 운영에 쏟아 부은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 음식점을 오픈했을 때는 손님의 90%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80% 이상이 중국인이다. 인터뷰를 할 때도 중국인 3인 가족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막 서울 여행을 다녀온 가족이었다. 왕 씨는 “인터넷 추천글을 보고 처음 와 보는데, 확실히 진짜 한국에서 먹던 맛이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음식점 운영 4대 원칙 가운데 하나는 모든 종업원이 숯불 조절과 삼겹살 굽는 방법에 능숙해져 고객들이 가장 맛있는 삼겹살을 먹을 수 있도록 ‘사장이 종업원을 직접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모든 손님을 세심히 관찰한다. 한국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라면 테이블에 밥과 함께 몇 가지 반찬이 나오고 심지어 ‘무한 리필’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손님이 반찬을 여러 번 추가하면 그 손님이 무슨 맛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죠. 단맛을 좋아하는지, 매운 걸 좋아하는지, 담백한 것을 선호하는지, 아니면 간이 센 것을 즐겨 먹는지 다 알게 됩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그는 베이징에 오래 산 사람일수록 한국 입맛에 가깝고 까다로우며, 외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달고 매운 맛을 선호한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중국 경제가 십 년이 넘는 발전을 거듭하는 사이 중국의 인건비도 높아지고 월세도 매년 오르고 있다. 주변 음식점들은 그새 주인이 바뀐 곳도 있었지만, 김 씨의 가게는 아직도 수익을 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왕징의 한국인들은 유동성이 커서 한국 손님에만 의존해 수익을 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식재료나 양념 또는 서비스에 좀 더 공을 들여야 입소문을 듣고 찾아 온 단골 고객들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씨의 가족도 현재는 베이징에서 김 씨와 함께 살고 있다. 큰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작은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김 씨의 아내는 전라도 사람이라 김치 담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가게일이 바쁠 땐 아내가 와서 일손을 돕기도 한다. 일이 조금 한가해지면 온가족이 차를 몰고 베이징 교외로 나가 드라이브를 즐긴다. 봄가을에는 등산을 하고 겨울이 되면 스키를 즐긴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가 말했다. “예전부터 분점을 내고 싶었는데 생각만큼 쉽지가 않네요. 일단 벌집 삼겹살을 열심히 브랜드화시킨 다음, 여유가 생기면 찬찬히 다음 단계를 생각해 볼 계획입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