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窓]그들이 버린 남자 이재용

2017-02-2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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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부국장 겸 산업부장

지난해 11월 세계적인 연출가 헤닝 브록하우스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라 트라비아타’는 이탈리아어로 ‘버려진 여자’를 뜻한다.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적인 사랑을 아름다운 선율에 담고 있다. 지난 17일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보면서 ‘라 트라비아타’의 비련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를 떠올려본다.

이 부회장은 이제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의 6.56㎡(약 1.9평)짜리 독거실(독방)에 수감돼 번호가 새겨진 수의를 입고 있다. 변호사를 제외하고 가족, 지인 등의 면회 횟수도 하루 한번으로 제한된다. 삼성이 창사 이후 79년 동안 총수가 구속된 것은 처음이다.

이 부회장의 시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특검은 이달 28일 전에 이 부회장을 기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본격적인 법정 공방에 앞서 삼성측이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할 수도 있지만 법원측이 이를 통해 석방한 사례는 매우 적다.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 최소 수년 간은 경영자로서 손발이 묶이게 된다. 그룹 총수로서 '죽음'이나 다름없다.

특검과 삼성 측의 주장은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쟁점은 청와대로부터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한 순환출자 관련 특혜를 받았느냐 여부이다. 특검 측은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한 후 공정위가 삼성의 순환출자 문제를 심사·결정하는 과정에서 특혜를 줬다고 말한다. 반면 삼성측은 당시 공정위가 제시한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한국거래소의 상장 규정을 바꾸도록 해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상장하는 데 특혜를 줬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삼성은 ‘거래소와 투자자의 요청에 따라 상장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삼성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 박근혜 대통령 사이의 구체적인 뇌물 및 청탁과 대가 관계를 두고 '다툼의 여지'가 있는 만큼 재판의 결과를 예단할 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런데도 이 부회장은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 자금을 지원한 대기업 오너 중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다.

이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 나선 이후 재계 총수들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지난 한해 동안에만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비브랩스’, 전장전문기업 ‘하만’, 퀀텀닷 소재 기업 ‘QD비전’ 등 8건의 인수합병(M&A)을 성사시키는 데 10조원 가량을 썼다. 사회공헌활동 측면에서도 가장 '통큰' 기부를 해왔다. 그가 석방될 경우 극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할 여지도 제일 많다.

일각에선 “이번 일을 계기로 환골탈태하면 오히려 삼성에 이익”이라느니 “회장 없다고 회사가 망하면 그게 기업이냐”고 꼬집는다. 참으로 한국 기업의 현실을 모르는 답답한 얘기다. 물론 당장은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문제는 미래다. 전문경영인은 신사업이나 M&A 등 미래를 좌우할 중대 경영판단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래서 최고경영자의 공백은 기업이 미래로 가는 발걸음의 중단이다. 외국 언론의 시각도 비슷하다. 로이터는 "이 부회장의 구속은 한국 최대 그룹의 (경영)전략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했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삼성그룹 경영에 정체가 우려된다"고 짚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 부회장의 구속이 삼성만의 일이 아니라는 대목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수출과 내수 부진 속에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안보위기 고조 등 크나큰 대내외 악재에 가로막혀 있다. 이런 악조건 속에 우리나라 제조업 전체 매출액의 11.7%, 영업이익의 3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 이 부회장의 구속은 한국경제에 큰 부담이 될 것이 자명하다.

이 뿐인가. 대기업들이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을 통해 준조세 형태의 공익적 기부금을 수십 년째 내왔음은 세상이 다 안다. 그동안 기업 인수나 합병도 많았고 그 과정에서 기업들은 법률 테두리 안에서 비용을 줄일 방법을 택했다. 특검이 그런 행위들을 뇌물로 단죄한다면 백번 양보한다 해도 대부분의 대기업들과 역대 대통령 모두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 부회장은 특검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검찰조차 피해자로 적시한 기업을 ‘곡 소리’가 날 때까지 두들기고 있다. '촛불 민심'을 의식한 정치권은 아량조차 없다. 여당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야당은 "당연하다. 박근혜 대통령도 엄정 수사해야 한다"는 환영 입장을 밝혔다. 재계는 잔뜩 주눅이 들어 여론만 살피는 형국으로 빠져들었다. 해외 경쟁기업들은 웃으며 지켜볼 뿐이다.

희망은 남아있다. 구속영장 발부가 이 부회장의 유죄 확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구속영장은 범죄 사실의 개연성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의 소명이 이뤄지면 발부되지만, 재판에서는 범죄 사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없는 정도의 '엄격한 증명'이 있어야만 유죄 판결이 난다. 유죄가 확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앞으로 계속될 법적 다툼의 과정을 구속상태로 진행할 이유는 없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는 "이 버려진 여자의 묘지에 한 송이 꽃도 뿌려지지 않으리"라며 애절한 탄식의 노래를 불렀다. 특검과 정치권은 한국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그들만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경제 살리기를 말하지 말라.


김종수 부국장 겸 산업부장 js333@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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