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양윈첸(楊雲倩) 기자 =정시린은 아름다운 미인, 세밀한 화조, 기세 높은 산수 등 중국화의 전통적인 소재에 능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여금화법’ 작품이다. 때문에 그는 ‘중국 여금화의 일인자’라고 불린다. 멀리서 봐도 아름답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세밀한 부분에서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작품에 자신이 창작한 시 두 구절을 직접 써넣고 역시 직접 새긴 인장을 찍어 한 작품에서 ‘시서화인(詩書畫印)’이 하나로 어우러지도록 했다.
독창적인 금색가루 화법
멀리서 보면 금빛 찬란해 화려하기 그지 없다. 가까이서 보면 독특한 질감이 입체적 효과를 낸다. 이것이 바로 여금화법의 아름다움이다. 성당(盛唐) 시기 중국에는 ‘역분첩금(瀝粉貼金)’이라는 화법이 있었다. 금박을 그림에 붙이는 기법이었다. 그러나 공정이 복잡해 송대 이후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정시린의 ‘여금’은 금색가루를 접합제에 섞어 사용한 것이다. 완성된 그림에 특수한 금색가루를 특별 제작한 관에 넣어 윤곽을 따라 그려준다.
금색가루 입자는 육각형이어서 보는 각도에 따라 화면이 다르게 반짝여 작품에 화려함과 입체감을 더한다.
정시린은 우연한 기회에 간쑤(甘肅)성 라부렁사(拉卜楞寺)의 거시커차이 츠즈무(格西科才·慈智木) 스님을 만났다. 그는 스님의 도움으로 탕카(티베트 불교회화) 관련 지식을 배우게 되었고 이 오래된 종교의 회화 예술에 깊은 관심이 생겼다.
탕카의 용지, 색감 및 화법은 중국화와 큰 차이가 있다. 정시린은 탕카를 그릴 때 전통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혁신을 가미했다. 그의 작품에는 전통 탕카의 풍부한 내용과 화려한 색채도 있지만 중국화 인물 공필(工筆·대상물을 꼼꼼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기법)의 세밀한 화법을 융합하고, 독특한 여금 방식을 가미해 웅장하면서도 절묘한 아름다움을 잘 살리고 있다. 정시린이 가장 만족하는 작품은 <석가모니 성도도(釋迦牟尼成道圖)>이다. 3년에 걸쳐 완성한 이 작품은 불교 역사를 소재로 총 499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색체가 화려하고 차원이 확실한 길이 11.5m의 대작이다.
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정시린은 사원들을 다니며 영감을 얻었다. 경전을 보고 사전을 뒤지고 관련 수업을 들었다. “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 듣기도 했지만 들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사원에서 돌아오면 정시린은 녹음과 사진을 바탕으로 자신이 이해한 것을 더해 그림을 그렸고 1년에 걸쳐 창작본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창작본을 들고 베이징 융허궁(雍和宮)의 당시 주지였던 자무양 투부단(嘉木揚·圖布丹) 스님에게 의견을 구했고 세부적인 부분을 10차례에 걸쳐 수정한 끝에 작품을 완성했다. 정성을 다한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정시린의 여금 탕카 작품은 거시커차이 츠즈무 스님, 융허궁의 자무양 투부단 스님, 중국불교협회,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 등이 소장하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과 은혜를 잊지않다
5살 때부터 그림을 배운 정시린은 처음에는 사합원에서 무대 디자인을 하던 이웃을 따라 ‘그래피티’를 했다. 이후 이허위안(頤和園)에서 스케치를 하다가 그를 일깨워준 스승인 위안즈옌(袁志雁) 선생을 만났다. 당시 위안 선생은 그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뒤에서 한 시간 넘게 그를 지켜봤다고 한다. 위안 선생은 회화의 대가인 제백석(齊白石) 선생에게 그림을 배워 중국화의 예술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정시린은 위안 선생에게 지도받으며 그림을 알아갔다. 이후 위안 선생은 그에게 중앙미술학원을 소개해주었고 유명한 인물화가인 장자오허(蔣兆和)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정시린의 회화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중앙미술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장자오허 선생의 가르침이었다. 인물화에 능한 장 선생은 중국의 전통 수묵 기법과 서양의 조형미를 창조적으로 결합하여 중국 수묵 인물 회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장자오허 선생은 그의 장점을 잘 발견했다. 장 선생은 정시린의 선이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워 미인도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장 선생의 지도를 받은 정시린은 회화의 심오한 경지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50여 년 동안 작품 활동을 했지만 정시린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책임감과 장자오허 선생의 “자신을 드러내고 옛 화가와 천하를 다투는 것에 급급해 하지 말라”라는 말을 지키고자 환갑이 되어 퇴직한 후에야 자신의 재능을 대중에게 드러냈다. 오랫동안 갈고 닦은 실력 덕분에 정시린의 작품은 세상에 공개되자 마자 큰 관심을 받았다.
2007년-2009년 정시린의 미인도 <서시완사(西施浣紗)><이화사녀(梨花仕女)><추천사녀(秋千仕女)><대옥(黛玉)> 등 작품이 <인민일보>에 실렸고 그의 작품은 국내외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2011년 길이 10m, 너비 1m에 달하는 미인도 <금릉십이차(金陵十二钗)>를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홍루몽>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일반적인 방식인 ‘십이차(十二钗)’의 험난한 운명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을 선택해 화폭에 담았다. 그림 속에서 원춘(元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의 집 화원 난간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나비잡기에 몰두하고 있는 보채(寶钗)는 고운 자태가 사람을 설레게 한다. 선녀같이 우아한 진가경(秦可卿)은 세상의 일은 모른 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정시린의 <금릉십이차>는 사람들에게 십이차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었고 미인도에 대한 정시린의 조예도 보여주었다.
정시린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그는 연말이 되면 자신의 작품을 정리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태워버린다. “좋지 않은 것은 세상에 남겨두면 안 된다. 자신의 명성을 해치고 미술에도 좋을 게 없다. 좋은 작품만 남겨놔야 한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