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개봉될 영화 ‘가려진 시간’(감독 엄태화·제작 ㈜바른손이앤에이·제공 배급 ㈜쇼박스)은 화노도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사건 후 며칠 만에 어른이 되어 나타난 성민(강동원 분)과 유일하게 그를 믿어준 소녀 수린(신은수 분)의 이야기를 담았다.
엄태화 감독은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되 현실적 상황들과 심리 묘사로 영화를 더욱 가까이 느껴지게 하였다. 거기에 데뷔작 ‘잉투기’가 그랬듯, 하나로 엮일 수 없는 두 공간을 섬세하게 봉합해 세계관을 확장하고, 완성했다.
- 다들 그렇게 걱정하셨는데 하하하. 생각보다 수월하게 넘어왔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다들 보자마자 결정해주셨다. 배우들도 그렇고 제작자분들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다들 새로운 이야기, 못 본 것들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분들에게는 도전일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 시공간이 멈춰있다는 설정,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이걸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던 찰나에 한 장의 그림을 보게 된 거다.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는 남자와 소녀의 뒷모습이었는데 이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멈춘 세계와 연결 지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평소 이미지나 음악에서 영감을 얻는 편인 것 같다
- 그렇다. 사실 어떤 테마를 잡고 가는 건 무의미한 것 같고, 나중에 다 써놓고 찾거나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해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가려진 시간’은 판타지지만 관객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실제라는 믿음을 줘야 했다
- 관객들도 수린을 통해 이야기를 보기 때문에, 있을 법한 일로 느껴지길 바랐다. 그러다가 문득 한 발 빠져서 생각해보면 절대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을.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적인 악인이 아니라 주변에 있을 법한 혹은 나의 모습을 영화 속에 담았다. 수린이를 통해 이야기를 믿어갈 때쯤, 바깥사람들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보게 되는 것.
바로 그 점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수린이 정말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신이 들기도 하는
- 그럴 수도 있겠다. 하하하. 과연 나라면 저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같이 의심하길 바랐던 것 같다. 권해효 선배가 수린이와 취조실에서 이야기하는 상황이 딱 영화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영화 속 아이들의 언어가 인상 깊었다. 정말 딱! 초딩스럽다고 할까? 보통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이들은 더 순진하고 예쁜 구석이 있는데 그런 걸 깨부수는 딱 평범한 초딩 같았다
- 어릴 때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짜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고등학생 때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봐도 우리 얘기 같지 않다고 할까? 어른들의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하면서도 그런 점들을 경계했다. 실제로 아이들을 만나서 어떤 말을 쓰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캐스팅된 후에는 아이들을 풀어놓고 놀게 하면서 무슨 말을 쓰는지 파악하기도 하고.
엄태화 감독의 예상을 벗어난 ‘요즘’ 아이들의 ‘요즘’ 언어는 무엇이었나?
- 여러 가지 있었다. ‘따봉!’ 이런 걸 써놨는데 애들이 질색했다. ‘대박 사건’ 같은 걸 많이 쓴다고 하더라. 욕도 가끔 섞기도 하고.
처음엔 강동원을 기다리며 영화를 봤는데, 어느 순간 그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였다. 아이들의 연기가 대단하더라. 이걸 잡는 것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 같다
- 현장에서 경직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캐스팅할 때도 일명 쪼가 있는 연기? 학원 연기를 하지 않는 친구들을 뽑았다. 그리고 이들끼리 친해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매일 모여서 피자도 먹고, 연기도 하고, 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아이들끼리 친해져서. 하하하. 거의 놀이터 같았다. 노는 걸 찍은 거다. 아이들과 찍을 땐 덩달아서 정말 재밌었다.
영화의 판타지로 구분되는 가려진 시간 속 세계도 인상 깊었다. 시간의 구분, 같은 공간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어땠나?
- 가장 큰 기준은 수린의 상상 속 범위였다. 수린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세팅했고, 세계 자체는 아이들을 통해 보니까 그들의 생각의 변화에 따라 공간이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예를 들자면 공포를 느낄 땐 공간 역시 색감이 달라지는 등.
디테일들이 정말 좋았다. 공간에도 전사가 있을 정도라고 하더라. 왕년에 덕질을 좀 하셨나보다
- 에이. 제 주변 친구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홍석재(영화 ‘소셜포비아’ 감독) 같은 진정한 오타쿠…. 하하하. 아무래도 멈춘 세계에 관한 것들을 많이 신경 썼다. 만화적인 상상력이 필요했다. 그 세계에 관련된 것들은 하나하나 세세한 것까지. 크리스토퍼 놀란(영화 ‘인셉션’ 감독)처럼 하고 싶었지만 그건 능력 밖이고. 하하하. 디테일한 설정이나 세계관을 구축했지만 굳이 관객이 몰라도 되는 것까지 알려줘서 허점이 드러나는 건 곤란하니, 일부분은 뺐다.
관객들이 ‘가려진 시간’을 덕질한다면?
- 태식과 성민의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이 가려진 시간 속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초점을 맞추실 것 같다.
예비 덕후들을 위해 삭제된 정보, 세계관을 공개한다면?
- 태식과 성민이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 왜 이들이 돌아왔냐고 한다면 영화 속에 힌트가 있긴 하다. 달의 주기로 설정을 했고 30일을 15년으로 설정됐다. 수린이가 말로 풀어서 알려주는 장면도 있긴 하다. 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 ‘어른이라는 게 언제일까?’ 그 기준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역들이 40분간 활약하고, 이후에 성인 배우들이 등장한다. 아역배우에서 성인 배우로 넘어가는 그 ‘등장 신’도 중요했을 것 같다
- 남자애들이다 보니까 꾀죄죄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씻으라고 안 하면 절대 안 씻는 애들처럼. 그런 특징을 살리려다 보니 그런 꼴이 된 건데, 너무 리얼하게 가면 몰입이 깰까 봐.
그래서 그런지 강동원과 엄태구의 비주얼 차이가 있었던 건가. 엄태구가 수염에 헝클어진 머리를 가진 것에 반해 강동원은 예쁘게(?) 망가졌다
- 하하하. 너무 심하게 가면 몰입을 망치고 오히려 실소가 나오는 경우가 있지 않나. 수린과 만나는 장면도 심각한 신인데 얼굴이 너무 더럽고 그러면 웃음이 터질까 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반면 엄태구는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주인공도 아니고, 환기되는 순간이다 보니까. 과감하게 이런저런 걸 시도해볼 수 있었다.
또래 배우, 강동원과의 호흡은 어땠나?
- 또래여서 편한 점도 있지만 사실 영화 쪽으로는 선배시니까. 항상 든든했다. 20회차가 오버되고 촬영에 지장도 많았는데 먼저 이야기도 해주고 제작사 쪽에 양해도 구해줬다. 그럴 땐 정말 큰 형 같은, 대들보 같은 역할이었다. 그러다가 웃긴 얘기할 때는 또 또래 친구 같고.
영화는 물의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인물들이 공포를 느낄 땐 어김없이 물이 등장하던데
- 그건 제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동갑인 친척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물에서 사고를 당했었다. 제 영화에는 늘 물이라는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그런 게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두려움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는 순간을 묘사할 때는 물이 등장하는 것 같다
영화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지만 어른이 되면서 조금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성인과 소녀의 사랑처럼 비칠 수도 있으니까
- 강동원 씨가 그런 지점을 많이 희석해준 것 같다. 아직 소년 미가 남아있는 사람이니까. 실제로도 그런 걸 많이 걱정했다. 강동원 씨는 ‘둘이 있는데 징그러우면 안 되는데!’ 했었다. 오히려 저는 걱정이 안 됐고.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첫사랑에 연관 짓기도 하던데
- 멜로라고 규정짓기보다는 아이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시작하는 건 아니니까. 우정일 수도 있고. 그런 감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췄지 절절한 멜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칫하면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까. 첫사랑이란 건 그냥 믿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이나 종류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같고.
이 외에도 새아빠와 딸의 관계 등, 어떤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긴장감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동안 관객들이 폭력에 많이 노출된 걸까?
- 배우의 힘인 것 같다. 김희원 선배님이 가진 긴장감이랄까. 사실은 되게 귀여우시고 재밌는 성격인데. 하지만 영화가 초반에는 큰 사건이 없으니까 그런 관계의 긴장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림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 비밀 노트, 암호를 설정한 뒤 홍학순 작가님을 섭외했다. 실제로 암호 예술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 암호를 제작해달라고 부탁했고 실제로 이 암호들은 모음, 자음이 다 있다. 실제로 그 일기장에 그려진 그림 언어는 다 해석이 가능하다.
엄태화 감독의 차기작은?
- 정해진 건 없다. 여러 가지 생각 중인데 구체적이진 않지만, SF 호러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