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동원(35)은 합리적이다. 주연배우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 또는 의무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이상,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믿고 투자한 이들에게는 수익률을, 영화를 선택해준 관객에게는 믿음을 주고 싶다는 바람은 곧 자신이 “가고 싶은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라는 걸. 강동원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11월 16일 개봉되는 영화 ‘가려진 시간’(감독 엄태화)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의 영화적, 연기적 스펙트럼을 확장함과 동시에 관객들의 재미를 충족시켜 줄 만한 작품이니 말이다.
영화는 화노도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사건 후 며칠 만에 어른이 되어 나타난 성민(강동원 분)과 유일하게 그를 믿어준 소녀 수린(신은수 분)의 이야기를 담았다. 판타지를 기반으로 섬세한 감성과 현실적 상황들을 엮어낸 것이 인상 깊다.
“사실 영화가 특정 연령, 성별을 타깃으로 하지 않을까 해서 걱정했었어요. 그런데 시사회가 끝나고 보니 남자분들 반응도 괜찮더라고요. 어느 한 관객층만 반응을 보이면 안 되니까. 걱정이 있었죠. 아주 상업적인 영화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상업성은 가진 영화니까요.”
꽤 명석하게 작품을 분석한다. 이럴 때 보면 배우가 아니라 투자자 또는 제작자 같기도 하다. 흥행과 재미, 작품성까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돌아보는 모습은 ‘왜 강동원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답변 같기도 했다.
“대박은 아니어도 실패는 하지 말아야죠. 그게 중요해요. 그래야 새로운 장르에도 도전할 수 있는 거거든요.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에요. 계속 상업적이고, 상업성이 도드라지는 작품만 한다면 관객들은 분명 실망할 거예요. 계속 비슷한 모습으로만 나타난다면 더는 볼 게 없다고 판단해버리실 테니까요.”
강동원의 합리적인 선택. 영화 ‘가려진 시간’은 분명 기존의 모습과는 또 다른 이미지의 제시이기도 했다. 그는 가려진 시간에 갇혀 몸만 자라버린 소년을 두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헤맸다. 너무 어른처럼 또는 너무 애처럼 연기할 수 없었으므로. 관객들이 충분히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부터 성민에 대한 콘셉트는 있었어요. 아이와 어른의 중간 정도? 혀 짧은소리를 가미해서 대사를 해보자고 생각했죠. 그 정도 톤을 생각하면서 중간중간 디테일한 부분을 살리고자 했죠.”
훌쩍 자라버린 소년과 그런 소년을 유일하게 믿어준 소녀의 이야기를 두고 어떤 이는 “첫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평했다. 하지만 강동원은 단호히 “휴먼 드라마”라고 답했다. “멜로 감성이 짙어질수록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 처음부터 첫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믿음과 관계에 대한…. 그러니까 휴먼드라마인 거죠. 극 중에서 이미 어른이 된 성민도 풋풋한 마음은 이미 사라졌을 거로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사랑보다는 누가 날 기억해주고, 알아봐 주는 것에 대한 갈망이 더 컸던 거예요.”
사랑과 우정의 중간 단계. 그 미묘한 갈등을 연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강동원은 냉정히 “멜로 감성이 있으면 이상해진다”면서도, “아주 없애버리는 건 또 아닌 것 같다”며 미묘한 줄다리기를 했다고 털어놨다.
“자신을 알아봐 줄 가족도, 친구도 없는 성민에게 수린은 큰 존재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런 성민에게 수린이 의지하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생기는데 ‘아직도, 얘는 날 좋아할까?’ 정도의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엄청난 멜로까지는 아니고요. 아주 미묘하죠. 멜로가 있으면 이상해지는데 아주 없애버리는 건 또 아닌 것 같고.”
성민 역을 위해 강동원은 최대한 소년에 가까워지려고 했다. “실하게 먹고 자라진 않았을 것 같아” 체중을 감량했고, 일상적 표정이나 어투에서 주변 아이들의 모습을 차용했다.
“어떤 모습에 국한하지는 않았어요. 성민이라는 캐릭터가 어른도 아이도 아니니까요. 다행히 제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 볼 수 있는 캐릭터라 좋았던 것 같아요. 대신 적당히, 적절히 포인트를 짚어내는 게 중요했죠. 가장 중요한 건 남자들이 봤을 때 오글거리면 안 된다는 점이었어요. 톤을 잘 잡아내는 게 중요했는데 (결과물이) 괜찮게 나온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농담 삼아 ‘쉽지 않은 캐릭터인데 내가 꽤 훌륭하게 해낸 것 같다’고 했어요. 하하하. 톤은 괜찮았던 것 같아요.”
섬세한 감정이 돋보이되 오그라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강동원의 말처럼 ‘가려진 시간’은 “오그라든다 싶을 때, 거침없이 속도를 내는 것”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는 엄태화 감독과 강동원의 조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동료로서 친구로서 작품을 일궈나갔다.
“또래 감독과 작업을 하는 건, 확실히 재밌죠. 얘기가 잘 통하고 편하니까요.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여관방에 모여 토론을 벌였던 일이었어요. ‘자, 어디를 쳐내고 어디를 찍을지 선택을 하자’면서. 하하하. 20회 차 정도 오버가 되면서 고생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어차피 오버된 거 그냥 다 찍자!’고 했어요. 제가 대표로 제작사에 가서 설득도 하고. 하하하.”
이전보다 더, 영화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재밌어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담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서 작품에 대한, 연기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졌다.
“새로운 작품에 도전할 때가 가장 재밌어요. 최대한 새로운 표현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요즘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도 만나고 있어요. 연기의 확장이기도 해요. 일하면서 ‘사람에게 배우는 게 제일 크다’고 느꼈거든요. 많은 영감 주시는 분들과 만나 대화도 하고요.”
합리적이고 타당한 고민과 선택. 그는 앞으로도 자신의 신념을 이어나갈 생각이다.
“앞으로도 연기적인 도전은 계속해나갈 거예요. 새로운 것들을 시작할 때가 가장 재밌으니까요. 높은 출연료 보다는 하고 싶은 영화를 하는 게 더 좋아요. 가끔 출연료로 설득하시기도 하는데 그런 건 기분도 별로예요. 반 농담으로 이미 충분히 잘 벌고 있으니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하기도 하고요. 대신 출연하는 작품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다음 영화를 만들 힘을 얻으려고. 강동원에게 투자하면 손해는 안 본다는 말을 듣는 게 좋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