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춘몽’ 속 이주영의 고백처럼, 배우 한예리는 한 편의 시다. 말갛게 웃는 얼굴 뒤에는 어떤 고단함이 숨어있고, 지질한 세 남자를 돌보는 품은 공평하고 따듯하다. 나른하고, 따듯하면서도 고요한 여자. 한예리는 영화 속, 예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춘몽’(감독 장률·제작 ㈜률필름·제공 ㈜스톰픽쳐스코리아·배급 ㈜프레인글로벌 ㈜스톰픽쳐스코리아)은 장률 감독의 10번째 장편 영화다. 수색동을 배경으로 변변찮은 세 남자와 그들의 여신, 예리의 꿈같은 일상을 그리고 있다.
그간 강렬한 캐릭터를 도맡았던 그는 점차 무게를 덜어내고, 본연에 가까운 얼굴을 드러냈다. 영화 ‘춘몽’은 그런 한예리의 민낯에 가까운 작품이다. 나른하면서도 따스한 미소를 지닌 한예리와 ‘춘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춘몽’이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주연배우로서 자부심을 느낄 것 같다
- 사실 영화를 찍으면서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감독님께 뜻깊은 작품으로 남길 바랐다. 개인적으로는 행복하게 촬영을 해서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이렇게 좋은 시기, 장소에서 많은 이들에게 ‘춘몽’을 선보일 수 있어 기쁘다. 영광스럽다는 생각이다. ‘춘몽’은 제게 사랑스럽고 짠한 작품이다. 촬영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장률 감독님다운 영화가 나온 것 같다.
장률 감독님과의 호흡은 어땠나?
- 감독님은 큰 그림을 말해주시고 그 안에서 배우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게 도와주신다. 어떤 지점까지 빨리 오기를 바라시는 게 아니라 잘 찾아오기를 기다려주시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즐거운 부분이 있는 것 같고.
장률 감독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들 역시 유명한 감독들이었다
- 이 영화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라 이전부터 알던 사이라서 부담감 같은 건 없었다. 저보다 감독님들이 ‘이 영화가 누가 되면 안 되겠다!’고 하셔서 정말 준비를 단단히 해오셨다. 훌륭한 배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률 감독님의 경우는 워낙 어르신답고, 좋은 분이니까. 모두 한마음으로 작품에 임했던 것 같다.
아름답고 따듯한 촬영현장이었지만 촬영 내내 많이 울었다던데
- 영화 안에서, 예리는 굉장히 굴곡이 많은 여성이지 않나. 계속해서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이걸 다 담으면서 괜찮은 척하는데 그게 마음이 짠하고 눈물이 나더라. 특히 영정 사진 찍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계속 났다. 예리가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데, 본인도 죽음을 직감했을 거로 생각한다. 그때 특히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예리는 세 남자의 엄마, 보호자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 연기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익준, 종빈, 정범과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건 예리가 중심을 잘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리가 누구 한 명에게 치중했다면 이 관계는 분명 무너졌을 거다. 죽기 전에도 이들을 보며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익준은 첫째 아들, 정범은 둘째아들, 종빈은 셋째 아들 같은 인상이었다
- 하하하. 실제로도 익준이 가장 나이가 많고, 정범, 종빈 순이다. 영화상에서도 그런 관계가 유지되는데 익준이 금전적인 것이나 아버지를 보살피는 걸 돕는데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정범은 자꾸 겉도는데 예리가 계속 챙기고 다독여줘야 한다. 종빈은 꾸준히 챙겨줘야 하고, 흘리는 게 없나 살펴봐야 하고…. 우유도 챙기고! 하하. 셋 다 너무 매력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세 남자가 예리에게 ‘꿈속에서 누구와 가장 먼저 잤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나. 배우의 입장에서도 저 질문을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 같은데
- 정말로! 정해두지 않았다. 하하하. 찍으면서도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들 패키지 같은 느낌이다. 그중에 한 명이라도 없으면 안 된다. 셋이 같이 살아야하지, 어느 한 명이랑은 싫다. 하하.
모두의 사랑을 받은 역할인데, 처음에는 민망해도 나중에는 뻔뻔해지기도 할 것 같다
- 극 중 ‘예리가 좋아!’라는 대사가 있는데 나중엔 그게 하나의 구호처럼 사용됐다. 약간 부담스러웠는데. 하하하. 나중에는 뻔뻔해지더라. 우리 영화의 가제는 ‘예리가 좋아!’였다.
극 중 예리를 연기하면서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 저는 예리가 ‘춘몽’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꿈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두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반에 더 나른한 느낌을 주고자 했고, 본인의 감정이 드러나기보다는 아주 얇게만 보였으면 바랐다.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미묘한 느낌이었다. 또 익준, 정범, 종빈이 워낙 캐릭터가 뚜렷해서 예리가 꿈처럼 느껴지려면 조금 더 흩어지는 느낌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본명이 불린다는 것도 신기한 경험일 것 같다
- 그보다 인터뷰에서 ‘예리가, 예리는…’하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한 경험이다. 하하하. 익준, 종빈, 정범 등 (감독들의 연출작인 ‘똥파리’, ‘용서받지 못한 자’, ‘무산일기’) 다들 전작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추가돼 나왔고, 전작과는 다른 인물로 완성됐다. 저 역시 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라고 말하기도 할 수 없다. 제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도록 연기하는 거니까.
‘춘몽’ 속, 예리와 배우 한예리의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 분명 닮은 부분도 있다. 맏이라서 사람들을 잘 챙기는데, 그런 모습도 비슷한 것 같고 이야기를 잘 안 한다는 것도 닮은 것 같다.
무용 전공자라서 그런지, 영화 속에서 유난히 춤을 많이 춘다. ‘최악의 하루’에서도 그랬고, ‘춘몽’도 마찬가지였다
- ‘춘몽’에서는 춤과 먼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몸에서 나오는 느낌으로.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춤은 꿈같기를 바랐다. 더 많이 몽환적이고 반복적으로 만들었다. 영화 속 춤은 제가 직접 구성했다. ‘최악의 하루’는 동작이 불명하고, 무용했던 사람 느낌이 나도록 만들었다. 배운 느낌으로.
자칫하면 민망할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확실히 매끄럽고 부담스럽지 않게 춤 동작들을 만드는 것 같다
- 감독님들께서 제가 춤을 추는 것을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저 역시도 장점으로 생각하고 있고…. 보는 분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하하. 편하다. 춤을 추는 게.
그동안 춘 춤동작이 한예리가 직접 만든 건 줄은 몰랐다
- 보통 현장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연기한다. ‘춘몽’의 경우, 유연석 씨와 함께 추는 장면이 있는데 제가 그분을 님이라 생각해서 율동에 ‘님아’라고 붙여 춤동작을 완성했다. ‘님아, 님아’하는 느낌으로. 하하하.
올해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많은 고민 끝에 선택했다는 느낌이다
- 고민이라기보다는 올해 목표가 ‘많은 걸 경험하고, 가볍게 선택하자!’는 것이었다. 즐겨보자는 생각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오히려 가벼워지니까 더 다양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 같다. 올해는 그냥 만족스럽고 부지런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배우 한예리에게 ‘춘몽’은 어떤 작품으로 남게 될까?
- 소속사 후배인 (고)성희가 개막작을 보고 내게 그런 말을 해줬다. “언니, ‘해무’랑 ‘춘몽’이 가장 언니에게 맞는 작품인 것 같다. 언니에게 매력적인 영화인 것 같아”라고. 개인적으로도 ‘춘몽’이 많은 의미로 다가온다. 예전에는 센 역할들을 소화하고 보시는 분도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이제는 여성적인 면면들 그리고 또 다른 매력이 많은 배우로 봐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