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강우석 감독의 최대 무기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는 태도는 이십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관객과 그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사극이라는 장르에 도전했다.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고 있는 고산자 김정호의 이야기다. 강우석 감독과 ‘고산자, 대동여지도’에 대한 궁금증을 묻고, 또 들어보았다.
- 영화 평을 보니 풍광에 대한 칭찬이 많더라. 박범신 작가가 간곡히 부탁한 것도 그런 거였다. 문자로 옮길 수 없었던 풍광의 아름다움을 영상에 담아달라는 것이었다. ‘문자로 옮기지 못한 걸, 영상으로는 가능할 것 아니냐’고 하시더라. 한을 좀 풀어 달라면서. 하하하.
- 가정사나 복잡한 인물구조 같은 건 배제했다. 이 영화는 예술영화가 아니니까. 박범신 작가도 ‘영화는 당신 마음대로 하라’며 ‘좀 쉽게 가라’고 하시더라. 대동여지도가 왜 보물인지 정확하게 전달하자는 마음으로 원작의 에피소드들을 선택했다. 조금 더 가야 하는 거 아니냐, 더 세게 가야 하는 거 아니냐 말도 많았는데 이 영화는 ‘가족영화’니까. 애초에 시나리오 단계서부터 고문이나 구타 등등 폭력적인 장면은 모두 빼고 시작했다.
영화가 가족적으로 느껴졌던 건 은은한 코미디도 한몫을 한 것 같다
- 코미디의 조율이 중요했다. 무거운 걸 누가 좋아하겠나. 재밌게 찍고자 했다. 박범신 작가가 말하기를 ‘박범신의 고산자가 아닌 강우석의 고산자를 찍으라’고 하더라. 그런 말들이 참 고마웠다.
코미디 덕분에 김정호의 인간적인 면모가 도드라졌던 것 같다
- 너무 얇은 영화가 나올까 봐 마음고생을 했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버지와 딸, 그녀를 흠모하는 남자와 선생과 제자의 이야기. 그 티격태격하는 과정은 재밌지만, 내용은 절대 얇은 이야기가 아니리라 확신했다.
풍광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정말 고생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영상에서 고생한 태가 역력했다
- 미술팀, 촬영팀이 정말 엄청 고생했다. 찾는 것부터 선택하는 것까지 너무 힘들었다. 영화 속 10초 등장하는 신을 위해 몇 날 며칠을 헤맸다. 차에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였다. 두렵기까지 했으니까.
기자간담회마다 ‘하늘이 도운 날씨’에 대해 말하곤 하셨다.
- 우리끼리는 현장에 ‘고산자가 와있다’고 했다. 백두산에 올랐을 때, 가이드가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자기는 수십 년간 가이드 생활을 해왔는데 이틀 연속으로 날씨가 이렇게 좋은 걸 처음 본다는 것이었다. 조명감독이 내게 ‘강 감독, 여기에 김정호 선생이 와계신 것 같아’고 하더라. 바우(김인권 분)의 광화문 신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내일 촬영을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아침이 되니 먼지 하나 안 날리는 거다. 참 희한하지…. 묘한 경험이었다.
영화의 리얼리티에도 많은 신경을 쓰신 것 같다. 특히 목판이었던 피나무에 대한 장면이 그랬다
- 피나무 때문에 피가 말랐다! 하하하. 현재 우리나라에 피나무가 딱 두 그루 있다. 하나는 홍천에, 하나는 양양에. 우리 영화에 나온 건 실제 피나무다. 나무가 쓰러지는 것도 CG가 아니다. 원판이 피나무라서 꼭 피나무로 만들고 싶었다.
스무 편의 영화를 찍었고, 스물다섯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제작하면서 연출도 놓지 않는다는 게 대단하다
- 난 영화를 찍는 게 좋다. 제작해서 기쁜 건, ‘100억을 벌어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겠구나!’하는 거지. 제작만으로 감동이 있는 건 아니다. 연출작으로 관객 호응을 받으면서 ‘아, 내가 살아있구나’하는 걸 느낀다. 연출하지 않을 땐 영화판에 있어야 할 이유도,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영화를 제작했는데도?
- 예전에 시네마서비스가 잘 나갈 땐 나름 재미도, 의미도 깊었다. 그땐 우리가 배급사 중 1위였으니까. 그런데 한 10여 년간 제작을 하면서 느낀 건, 그 사이사이 찍었던 내 영화들인 거다. 한 3년여 간 영화를 안 찍었더니 관계자들이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거다. 아! 큰일 났다 싶었다. 충격받았다. 그래서 바로 ‘실미도’를 찍었지. 조금 더 보태자면 나는 김정호 선생이 지도를 만들 때의 그 희열, 즐거움을 이해한다.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일이라는 것.
이따금 사람들은 대중적인 것, 상업영화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나. 하지만 대중적인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 쉬운 것을 어렵게 풀지 말자는 게 내 지론이다. 유치하다는 소리만 안 들으면 돼. 하하하. 온갖 직업, 연령, 다수를 만족하게 하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들과 호흡해야 하는 거다.
확실히 대중적이려면 여러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 그렇다. 집 근처에 한 카페가 있는데 나는 그 아르바이트생들과 꼭 한 번씩 대화해본다. 내가 감독인 걸 아는 (어린) 친구들에게 농담을 걸기도 하고. 그런 대화를 통해 어떤 ‘접근’에 대해 공부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건 ‘올드(Old)’다. 나이가 들어 영화가 깊어지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나이가 들었네! 라는 말은 조심해야 한다. 임권택 감독님의 ‘화장’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하나도 안 늙었구나 싶은 거다. 늘 공부해야 하고, 수련해야 한다. 어떤 성공에 갇혀서 우쭐거린다면 트렌드를 읽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코미디만큼 트렌디한 게 또 없을 것 같은데
- 그래서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tvN ‘코미디 빅리그’나, KBS2 ‘개그콘서트’는 꼭! 그중에서도 정말 반짝반짝하는 친구들이 있다. 정말 대단하지. 그런데 눈에 띄는 건 요즘 ‘맛있는 녀석들’의 김준현이나 ‘삼시세끼’의 유해진이다. 순간의 재치들을 보면서 ‘와, 쟤네 머리가 보통이 아니네’하는 생각이 든다.
감독님이 자신하고 사랑하는 강우석 표 코미디는 언제 볼 수 있나?
- 한 번 하려고 한다.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자신이 있거든. 내가 관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즐거움’이다. 거기에 뭉클함도 느끼면 좋고. 그건 늘 내 미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