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94]한·일 국교수립 정상화 추진 위해 방탄내각 구성

2016-08-22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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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94)

제5장 재계활동 - (89) 자중지란(自中之亂)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헌정(憲政)을 회복한 제3공화국은 통치 질서의 변동을 의미했다. 이제 3권을 장악한 최고회의는 없어졌다. 야당이 참여해 있는 의회(議會)가 있고 헌법상 보장된 권한을 가진 내각(內閣)이 있었으며,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비서실 역시 법률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다. 헌정은 제도와 조직에 의해 정치 기능이 분산되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최고회의 종반의 시련을 값비싼 경험으로 받아들인 듯 강력한 지도자 아래 2인자란 없다는 원칙 아래 그의 막료진인 공화당과 행정부,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 사이에 균형을 취했다. 공화당과 국회는 당의장(黨議長)으로 복귀한 김종필(金鍾泌)로 하여금 이끌어 가게 함으로써 김종필 당의장은 대통령을 도와 정치를 이끌어 가는 주역의 자리에 있었다.
김종필은 그의 맹우(盟友)이며 책사(策士)인 김용태(金龍泰)를 민주공화당 원내총무로 하고 12개 상임위원회 위원장 선정은 처음에는 각 교섭단체별(交涉團體別)로 안배를 한다고 하다가 태도를 바꾸어 공화당 주체들로 채워 버렸다.

제3공화국 초기 내각의 각료(閣僚) 발표는 12월 12일에 있었는데, 총리에는 최두선(崔斗善)이 기용되었다. 최두선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 보성 전문학교를 인수하여 학교 경영에 나섰을 때 그의 유일한 상담역(相談役)으로 줄곧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의 이사로 있어 왔고, 목당(牧堂) 이활(李活)과는 그가 1946뇬 2월 인촌이 정당 활동에 투신하게 되어 유진오(兪鎭午)와 함께 재단이사가 된 뒤로 학교 경영에 대해 상의해 온 사이었다.

각천(覺泉) 최두선(1894~1974년)은 목당보다 5세 위였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철학과를 나와 독일에 유학, 마부르크 대학과 예나 대학, 베를린 대학을 거치면서 철학 연구를 한 인물로, 인촌이 가장 신임했던 사람들의 한 사람이다. 그런 각천의 국무총리 등용은 김종필의 구상으로 실현된 것임이 드러났다. 박 대통령 정부의 최대 정치 숙제가 한·일 국교정상화(國交正常化)라면 한바탕 파란이 예상되는 난제(難題) 앞에서 그들은 방탄내각(防彈內閣)을 생각한 것이다.

각천이 총리 교섭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목당은 현민(玄民) 유진오와 자리를 같이 한 일이 있었다. 현민은 몇 달 동안 국민운동 본부장을 지낸 경험이 있었고, 목당은 공화당 창당에 가담하여 현재 당무위원이며 재정부장으로 있어 각천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한 것이다.

현민이 국민운동 본부장을 맡은 것은 군인과 기성 정치인의 중간에 서서 중간 역할을 해보려고 그 자리를 받아들인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각천 내각에 요구되는 것도 야당과 여당간의 격돌과 학생 데모의 무마에 있을 것인즉 대화와 설득의 순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 간다는 기본 방침을 지킨다면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군정하(軍政下)의 4대 의혹 사건, 민정 이양 과정의 격렬한 대립, 2년 동안의 정치 공백을 거쳐 정치무대로 복귀한 야당의 정치 공세 등 온갖 화살을 막는 것이 최내각(崔內閣)이고 보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선 대화와 설득 이외에 무슨 뾰족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목당은 선거를 치르고 당으로 돌아오자 많은 변화가 일고 있음을 감지(感知)할 수 있었다. 이효상(李孝祥)과 백남억(白南檍)·김성곤(金成坤)의 등장은 확실히 야당의 반격에 대비한 조치로 보였다. 백남억은 4·19 이후 실시된 7·29 선거에서 참의원(參議院)에 진출해 민주당(民主黨) 구파(舊派)가 분당하여 새로 창당한 신민당(新民黨)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런 연고로 그는 당시 야당의 주류였던 민주당 구파계(舊派系)의 사람들과 넓은 친분을 갖고 있었다. 김성곤도 구 자유당 출신이므로 이효상을 국회의장으로 민 것은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또 한 사람의 참모가 있었으니 질서 유지의 책임을 맡은 엄민영(嚴敏永) 내무부장관이 장본인이다.

엄민영(1915~1970년)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대학원 출신으로 경희대학교 법대 학장으로 있다가 초대 참의원으로 정계에 나와 동향(同鄕) 출신이며 학계에도 같이 몸담고 있던 백남억·이효상과 친분을 맺어 온 것이다.

이들을 당의 주역(主役)으로 하여 야당 공세를 방어하자는 데 박 대통령과 김종필이 의견을 같이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들은 이들대로 야심을 보이고 있었다. 풋내기 군인들에게 정치를 맡길 수는 없지 않느냐는 자부심으로 이들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당은 공화당의 새로운 새력판도(勢力版圖) 형성을 보며 언젠가는 올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예감했다. 다른 의미에선 목당은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소외된 존재임을 발견하였다. 난세(亂世)일수록 인심은 험하고 매섭게 마련이 아닌가. 장자열어구편(莊子列禦寇編)에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人心險於山川 難於知天”(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의미)이라는 한 구절을 읊조려 보는 목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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