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는 "한국이 상호 신뢰를 훼손시켜 유감"이라는 강한 표현을 썼다. 윤 장관이 발언할 때는 손사래를 치거나 턱을 괴는 등 공식 회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을 연출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에 대해서는 회담장 밖까지 마중을 나온 뒤 그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두 회담 모두 중국 측 의도에 따라 공개 범위가 확대됐고 취재도 더 자유롭게 허용됐다. 왕 부장은 한·중 관계 악화를 각오하라는 신호를 한국에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왕 부장으로 말하면 외교적인 연출에 있어서는 대가(大家)급에 속한다. 과거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만나 매스컴 사진 촬영에 응할 때는 자신의 검지를 케리 장관을 향해 뻗어보이곤 했다. 상대방에게 뭔가 지적을 하는 듯한 분위기를 살짝 느끼게 한다. 사전 약속에 따라 그를 방문하면 꼭 약속 시간보다 5분가량 뒤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를 접해본 국내 고위 외교관의 경험담이다.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생각이 엿보인다.
그의 외교관 경력은 대단하다. 베이징 제2외국어대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왕이는 졸업 뒤 1982년 29세 때 외교부에 들어갔다. 아주사(司·국에 해당) 사장, 6자회담 중국 측 수석대표, 주일 대사를 지내는 등 중국내 최고 아시아통으로 꼽힌다.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중국 외교학원)도 있다. 1953년생으로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동갑이다.
남북한 어느 한 쪽도 내칠 수 없다는 중국의 딜레마가 읽히는 대목이다. 즉 사드 배치를 둘러싼 우리의 고민은 시각을 달리하면 중국의 것이기도 하다. 우선 한·미·일 대 북·중·러 냉전 구도가 재연되면서 동북아 군비 경쟁이 가속화되고 이 경우 한반도가 피해를 입게 된다는 논리를 보자. 타당한 지적으로, 우리로서는 피해야 할 상황이지만 중국도 바라지 않는 바이다. 중국은 미·일 동맹에 한국이 편입돼 중국 포위망이 구축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 왔는데 사드 배치는 바로 그러한 국면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중국은 한국을 미·일 동맹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공을 들여왔다. 우리도 한반도 미래를 둘러싼 '중국 역할론'에 기대를 걸면서 '중국 경사론'이 대두되는 걸 불사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중국 전승절 때 천안문 성루에 오른 건 그 절정이었다. 중국이 이번에 강하게 반발하는 데에는 한국을 미·일 동맹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허물어진 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강대국 외교에 있어서 우리를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놓고 생각한다면 최근 사드 사태에도 불구하고 향후 일정한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우리가 걱정하는 경제 보복 관련해서도 중국 역시 고려해야 할 요소가 적지 않다. 양국 간 경제 구조는 상호 의존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중국이 섣부른 행동을 취하기에는 부담이 따른다. 더욱이 시 주석으로선 지금 침체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할 처지다. 국내 상황이 안보를 앞세워 경제성장을 희생시킬 만큼 여유롭지 못한 것이다. 중국이 우리에 비해 훨씬 강력한 수단을 갖고 있긴 하지만.
다시 한·중 외교장관 회담으로 돌아가보자. 윤 장관이 왕 부장에게 전초제근(剪草除根·풀을 없애려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뜻)을 말한 건 적절했다. 우리가 사드를 배치키로 한 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때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중국에게는 '뿌리를 뽑는' 역할을 충실히 해달라는 주문을 담았다. 하지만 "북한 핵이 해결되면 사드는 자동 철수"라고 명백히 밝히고 이를 언론에 부각시키지 않은 건 잘못이다. 중국과 미국은 물론 국내의 사드 반대파를 향해서도 이러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언급을 하고도 발표를 하지 않은 것인지, 아예 발언조차 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미국 눈치 보느라 그랬을까. 북한 핵을 둘러싼 '중국 역할론'과 '중국 책임론'의 양 극단을 오가는 것도 문제지만 미국 논리에 끌려다녀서도 곤란하다. 미국과 손을 잡는 게 곧 한반도 평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는 역사가 이미 입증했다. 우리만의 지혜로운 길이 필요함을 다시금 새겨야 할 때다.
(아주경제 중문판 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