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클라이맥스는 적벽대전이다. 그렇다면 세계 전자상거래업계의 슈퍼파워, 알리바바 그룹 사상 최고의 클라이맥스는 어느 대목일까? 그 건곤일척 일대혈전의 전말은 이렇다.
2003년 4월 어느 날, 알리바바 총수 마윈(馬雲)은 도쿄의 한 중화요릿집에서 소프트뱅크 총재 손정의를 만났다. 대화 도중 한국인 3세 글로벌 큰손은 주위를 둘러보며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도쿠가와 쇼군, 미야모토 무사시, 청석골 임꺽정을 3분의 1씩 섞은 듯한 어조로 머릿속의 기업경쟁력 평가표를 펼쳐 보였다.
“이베이(eBay)와 알리바바의 플랫폼 수준은 비슷하다. 이베이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노(NO)' 다. 일본에서 야후는 이미 이베이를 제쳤다. 이제 중국 차례다. 당신 마윈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소상공인의 수호협객을 자처하는 마윈이 신비의식을 끝마친 그날 저녁 8시 정각, 인터넷에 '타오바오닷컴(taobao.com)'이 정식으로 개설됐다. 타오바오의 탄생은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이정표적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마윈이 기업간거래(B2B) 영역을 수직으로 '드릴링'하고 있다고 여겼을 때, 실상은 은밀히 소비자간거래(C2C)영역을 수평으로 '터널링'하며 나아갔던 것이다. 후일 마윈은 술회했다.
“1995년 내가 중국 최초로 인터넷회사를 차렸을 때 사람들은 나를 사기꾼이라고 했다. 그때는 억울하고 화가 났다. 사기꾼이 아닌 사람보고 사기꾼이라 하니까…… 2003년 타오바오를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했다. 그때는 오히려 고맙고 기뻤다. 이제야 사람들이 내가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구나 하고.”
①남이 없으면 나는 있고(알리바바) → ②남이 있으면 나는 뛰어나고(중국최고 B2B) → ③남이 뛰어나면, 나는 새롭다(타오바오).
마윈은 이러한 승리의 삼단 멀리뛰기로 전자상거래업계에서 중국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눈앞의 경쟁상대 이베이는 클래스 자체가 달랐다. 삼단 멀리뛰기 그랜드슬램을 몇 년간 연속으로 휩쓸고 있는 세계챔피언이 아닌가. 타오바오 출범 당시 중국의 C2C 온라인쇼핑몰 시장에 대한 전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의 C2C시장은 미국처럼 성숙하지 않았다.
타오바오의 등장은 곧 글로벌 C2C 강호의 방주 이베이에 내미는 도전장이었다. 당시 이베이의 연간 영업이익은 70억 달러인데 알리바바는 고작 1억 달러에 불과했다. 행여 알라딘의 마술램프 속 거인 ‘지니’라도 나와서 마윈을 도와주면 모를까. 승산이 없어 보였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도전자 타오바오는 이베이에 다채로운 광고전을 펼치며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그러자 '무서운 범' 이베이는 중국 인터넷업계와 연합하여 하룻강아지 타오바오를 '봉살(force-out)'하는 ‘미·중 C2C 카르텔’을 체결했다. 미중 C2C 카르텔 연합군은 타오바오의 모든 온라인 광고루트를 철저히 차단했다.
공중의 그물망, 인터넷에 가하는 공중봉쇄는 치명적이었다. 타오바오의 광고루트는 전통 굴뚝산업의 그것처럼 버스와 에스컬레이터, 지하철 벽이나 운동장 등 지상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베이 측의 패권·독점적 수법은 타오바오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렸다.
파멸 일보직전, 행운의 여신이 손을 내밀었다. 방심한 이베이가 돌연 회원 유료화를 실시한 것이다. 마윈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무림고수는 촌음 사이에 상대방의 허점을 잡아내어 승패를 결정짓는다. ‘3년간 타오바오 수수료 완전무료’라는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세계 1위 전자상거래기업 이베이의 바벨탑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마윈의 수수료 무료화는 이베이를 공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인민 좌우명’으로 삼은 듯, 현금 이외는 '삼라만상 우수마발'을 의심하는 ‘의심의 끝판왕’ 중국인들을 전자상거래 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경영의 성공은 디테일에 있고, 실패는 프레임에 있다. 유료화는 계란을 꺼내기 위해서 닭을 잡는 거나 매한가지, 이베이의 패인은 상대를 경시하고 잘못된 프레임을 짠 것에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실수로 얻은 승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수수료 무료화는 그야말로 자기 몸을 상해가면서 꾸며낸 계책, 고육지책으로서 오래 유지할 것이 못 된다. 여전히 남은 나보다 더 있고 더 뛰어나고 더 새로운데, 어떻게 해야 남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렇다. 멀리뛰기로 안 되면 높이뛰기로 지존 이베이의 높은 벽을 뛰어넘는 거다. 그러려면 대다수 중국인 ‘현금교 신도’들에게 직접 현금을 주고받지 않는 온라인 거래를 믿게 하는, 견실한 플랫폼을 설치해야만 했던 것이다.
마윈은 2003년 10월 타오바오 플랫폼에서 ‘남이 새로우면 나는 신기한’ 높이뛰기를 시전했다. 즉, 담보 플랫폼 서비스, 제3자 지불결제 솔루션인 알리페이(Alipay, 支付報)를 창제했다.
알리페이는 단 한 번의 클릭만으로도 안전하게 결제할 수 있게 한 온라인 간편결제 시스템이다. 은행계좌나 신용카드를 알리페이 계정에 등록하여 전자상거래 웹사이트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사용한다. 제3자 결제 시스템인 알리페이는 상품 배송기간 동안 구입대금을 가지고 있다가 구입자가 상품수령을 확인한 후에 판매자에게 구입자금을 전해주는 방식이다.
마윈은 알리페이로 온라인구매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일단 성공했다. 타오바오는 중국 전자상거래시장을 소비자들이 믿고 구입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꿨다.
자, 여기까지. 끝났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치명적인 대목이 하나 있다.
도대체 알리페이의 법적근거는 무엇인가?
2003년 10월 당시 알리페이, 즉 제3자 지불결제시스템과 관련한 중국의 법률 법령 등 제도적 장치는 철저한 공백상태였다. 필자는 당시 우리나라 국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이 제정한 법률뿐만 아니라 국무원, 각부 위원회가 제정하는 행정법규(국무원령), 부문규장(부령), 심지어 각지의 지방 성규범(조례, 규칙) 들까지 들여다 보았으나 단 반 토막의, 한 글자의 법적 근거도 찾지 못했다.
다시 중국에서 출간된 수십 권의 마윈 전기를 비롯, 접근 가능한 온·오프라인상의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져보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다. 마윈이 사전에 관계당국과의 사전협의나 긴밀한 교감을 가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알리페이는 마윈 개인이 아무런 법적 근거없이 사사롭게 자의적으로 만든 ‘불법 사금융 시스템’이었다. 엄격히 말해 마윈은 당시 중국 금융법질서와 금융관행을 파괴한 범법자였다.
“만일 우리나라 같았으면 마윈은 어떻게 되었을까?” 답은 기다릴 필요조차 없는 우문인 것 같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2004년 8월 28일(길일)을 기해 제3자 지불결제시스템을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전자서명법(电子签名法)'을 제정, 2005년 4월 1일 시행하였다. (**중국인민은행은 2013년 6월 7일 더욱 편리하고 안전한 제3자 지불거래시스템을 보장하는 '지불기구 고객지불준비금관리 판법(支付机构客户备付金存管办法)'을 공포 시행 중)
그렇다. 이베이를 물리친 최대 영웅은 중국정부였다. 다시 말해서, 이베이의 숨통에 마지막 검을 찔러 넣어버린 자는 마윈이 아니라 중국정부인 것이다. 중국정부는 마윈을 엄벌에 처하기는커녕 없던 법률을 새롭게 만들면서까지 경쟁에 살아남겠다고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자국의 볼품없는 기업가를 구해주었다. 결국 2006년 중국시장에서 거의 사체화한 이베이는 미국으로 운구되었다. 즉 이베이는 결국 중국시장에서 철수한 것이다. 소상공인의 수호협객 마윈의 수호천사는 다름 아닌 중국정부였다.
“만일 우리나라 같았으면 마윈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이런 우문을 또 반복하게 되는 필자는 분위기 파악이 덜 된 자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원활한 창업과 효율적인 기업경영을 위해 최적화된 법제 인프라 구축에 매진하는 중국정부가 부러울 때가 많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