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초대석] "소록도 시절 너무 행복했어요. 이따~만큼…다시 오니 기뻐요"

2016-05-2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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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자와 '한평생'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

오스트리아서 간호대 졸업 후 28세 나이로 한국행…한센병 환자와 43년 동고동락

대장암 투병하다 '환자에 부담된다' 귀국…병원 100주년 맞아 다시 소록도 찾아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사진=보건복지부 제공]


아주경제(전남 고흥) 조현미 기자 = "아주 기분이 좋아요. 여기에 다시 오게 돼 정말 기뻤어요." 백발의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ger·83) 수녀는 소록도에 돌아온 소감을 말하며 소녀처럼 웃었다.

2005년 조용히 고향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드 수녀가 11년 만인 지난 4월 소록도를 다시 찾았다. 전남 고흥에 있는 한센병 전문병원인 소록도병원의 개원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그와 함께 40년 가까이 소록도에서 동고동락했던 마가렛 피사레크(Margreth Pissarek·81) 수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함께 오지 못 했다. 마가렛 수녀는 현재 가벼운 치매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다.

두 수녀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주에 있는 인스브루크대 간호대를 나왔다. 천주교 그리스도왕국시녀회 소속인 이들은 "한국 소록도에 한센인을 돌볼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현지 가톨릭 주교의 말에 주저하지 않고 서둘러 짐을 쌌다.

간호대 졸업 후 인스브루크의 한 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마리안느는 1962년 2월 소록도에 들어왔다. 당시 나이는 28살. 이어 간호대 룸메이트였던 마가렛 수녀가 1967년 10월 소록도로 들어왔다.

소록도는 환자들 스스로도 '저주받은 섬'이라고 불렀을 만큼 소외되고 척박한 곳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애초 5년만 근무하고 다른 곳으로 옮길 예정이었지만 환자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마리안느 수녀는 "5년마다 병원을 옮길 계획이었는데 하루하루 머물다 보니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 (시간이) 참 빨리 가더라"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두 사람이 소록도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미감아를 돌보는 것이었다. 미감아는 한센인 부모를 두고 있지만 한센병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 어린아이를 차별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이 아이들은 5살이 되면 부모와 헤어져 미감아 보육소에서 살았다. 당시 소록도에는 6000명의 한센인이 있었다.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는 '영아원'이라고 부르는 허름한 창고에서 수많은 미감아들에게 우유와 먹을 것을 주고, 엄마의 마음으로 정성껏 돌봤다.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던 개신교 신자들도 이들의 진심을 알고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오른쪽)가 소록도에서 어린이를 돌보고 있다.[사진=보건복지부 제공]


오스트리아에서 한센병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을 가져왔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의사이고 언니는 약사였던 마가렛 수녀는 가족에게도 도움을 청한 것이다.

소록도에 영아원과 결핵병원, 정신과 병동, 목욕탕 등이 세워진 데도 이들의 도움이 컸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가톨릭부인회 등을 통해 소록도에 필요한 시설을 짓는 데 필요한 예산까지 마련했다.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 사람들을 환자나 신자로 구분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친구'였다"며 "환자들에게 별명도 많이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한센인을 '친구'로 여긴 두 수녀의 진심은 병원 직원들도 변화시켰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5월 조선총독부는 소위 '문둥병'으로 불리는 한센병에 걸린 환자를 강제로 격리하기 위해 '자혜의원'(현 소록도병원)을 만들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소록도에 있는 환자들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반말을 하고, 구타를 일삼았다. 유전병이 아님에도 임신한 여성에겐 낙태 수술을, 남성에겐 불임수술이 강제로 시행됐다.

해방 이후에도 이런 문화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환자들은 직원을 '선생님'으로 부르며 떠받들어야 했고, 반말을 하는 직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는 환자들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존댓말을 썼다. 스스럼없이 한센인들과 식사를 하고, 매일 새벽 5시부터 나이 든 환자의 병실에 따뜻한 우유를 배달했다. 본인들의 집으로 환자를 초대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환자 생일엔 직접 생일 케이크를 구워 선물했다.

당시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들은 전염을 우려해 진료할 때 꼭 장갑을 끼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은 맨손으로 피고름을 짜고 약을 발라줬다. 병원 직원들도 편견과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한센인을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들의 선행이 알려지자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잇따랐지만 두 사람은 한사코 거부했다. 정부나 단체가 주는 상도 마찬가지로 사양했다.

고국인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전해왔지만 거절해 오스트리아 한국 대사가 직접 소록도를 찾아 전달했을 정도다. 한국 정부가 준 국민포장(1972년)과 국민훈장 모란장(1996년)도 청와대 관계자가 소록도로 찾아와 수여했다.

마리안느 수녀는 지난달 말 열린 일생 첫 기자간담회에서 그간 인터뷰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 '특별한 일이 아니어서'였다고 밝혔다.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한 게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의 복음을 따랐을 뿐이고 환자들을 돕는 게 좋았어요. 진짜 특별한 일은 하나도 안 했다고 생각해요."

어느덧 소록도에 머문 기간이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살았던 시간보다 많아졌다. '소록도에서 죽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05년 11월 21일 돌연 소록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다. 낡은 여행가방 한 개씩만을 가진 채였다. 광주대교구 주교와 소록도성당 신부, 소록도병원장 등 극소수만 이들의 귀국을 미리 알고 있었다.

환자들에겐 편지 한 통을 남겼다. 혹여 직원들이 따라 나올까 봐 관사에 두지 않고 광주에 나와 우편으로 보냈다. 전라도 사투리를 곧잘 하고 된장찌개를 즐기는 두 수녀를 '소록도 할매'라 부르며 어머니처럼 따랐던 한센인들은 뒤늦게 이들이 떠난 것을 알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두 사람은 서툰 맞춤법으로 쓴 두 장의 편지를 통해 떠나야 하는 이유를 밝히며 용서를 구했다.

이들은 편지에서 "한국에서 같이 일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저희가 충고하는 말이 있는데, 제대로 일할 수가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줄 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서 같이 지내면서 저희의 부족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을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고 전했다.

마리안느 수녀는 2003년부터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한국에서 수술만 세 차례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마가렛 수녀도 일흔을 넘겨 건강에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소록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던 두 사람은 각각 43년과 39년간 생활했던 '제2의 고향'인 소록도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때는 아프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결정을 하는 거 마음이 아프고 어려웠습니다. 소록도를 떠나는 배에서 우리도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돌아가서도 이곳 친구들이 그리웠습니다." 마리안느 수녀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두 수녀는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빈곤층이 받는 최저 수준의 국가연금으로 민가와 양로원에서 생활 중이다. 이들이 속한 그리스도왕국시녀회가 일반인과 함께 속세에 머물며 생활하는 '재속회' 소속이라 돌아갈 수녀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 측에서 제안한 노후보장과 금전적인 지원은 사양했다.
 

지난 4월 24일 전남 고흥 소록도성당에서 마리안느 스퇴거(앞줄 왼쪽 4번째) 수녀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당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소록도병원 제공]


몸은 오스트리아에 있지만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소록도 머물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 마트레이에 사는 마리안느 수녀는 토요일마다 1시간씩 박성이 전 소록도병원 간호팀장과 통화하며 소록도 소식을 듣는다. 일주일에 3번씩 20㎞ 떨어진 인스브루크에 가서 마가렛 수녀와 미사를 참여하고 소록도 추억을 나눈다고 한다.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소록도성당과 고흥군 초청으로 지난달 13일 방한했다. 다음 날 소록도를 다시 찾아 그리워하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을 만났다. 소록도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에서 내내 괴롭히던 천식이 싹 사라졌다. 생일을 맞아 4월 24일엔 이곳 식구들과 조촐한 생일잔치도 열었다. 그는 6월 초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예정이다.

삶의 대부분을 한센인을 돌보며 소록도에서 보낸 마리안느 수녀. 소록도 생활이 행복했냐는 질문에 "네 행복했어요. 이따~만큼, 하늘만큼 이요"하며 양손을 크게 벌렸다.

고흥군은 작년 12월 '소록도 자원봉사자 마리안느·마가렛 선양사업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같은 달 소록도성당은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을 결성했다.

사단법인 마리안느·마가렛은 두 수녀의 삶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올 연말에 개봉할 예정이다. 두 수녀가 선종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2차 다큐멘터리도 계획하고 있다. 고흥군은 이들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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