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공개된 터키산 수입 금지 품목 리스트만 해도 러시아의 의지가 얼마나 강경한지 보여준다. 오렌지, 포도, 배 같은 과일류부터 토마토, 오이, 브로콜리 같은 채소류까지 사실상 식탁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농산물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견과류와 어류, 레몬은 금지 품목에서 제외됐다. 지난 1월부터 10월까지 터키가 러시아에 수출한 레몬양은 약 9만 톤으로, 5380만 달러(약 633억원)어치에 달한다. 어쩌면 레몬 수입 금지가 터키의 돈줄을 막는 압박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러시아는 왜 레몬을 빠뜨린 걸까.
러시아가 터키산 레몬을 수입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그동안 수입해왔던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에서 기후 변화 탓에 생산량이 줄면서 레몬 가격이 3배나 오르자 대안으로 찾은 곳이 터키였다. 터키산 레몬 수입량은 2013년 전체 수입량의 62%에서 1년 사이 90%까지 뛰어올라 주요 수입 품목이 됐다.
이번에 대안을 찾지 못한 이유는 툭하면 금수조치를 내리는 러시아의 외교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상반기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일부 식품에 대한 금수조치를 내렸다. 같은 해 8월에는 미국을 비롯해 스페인, 네덜란드 같은 EU산 식품과 농산물 수입을 중지했다. 서방의 대러 제제에 따른 보복 차원이었다. 무분별한 금수 조치가 결국 러시아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리스트가 공개되자 반(反)터키 정서가 고조됐던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당혹감이 비춰지고 있다. 수입 농산물 20%가 터키산이었던 만큼 가격 폭등으로 인한 서민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벌써부터 러시아 내 토마토 가격이 2배 가까이 뛴 것으로 나타났다. 터키 제재를 통한 경제적 압박이 결국 러시아에게도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러시아와 터키의 갈등은 장기화될 조짐이다. 대표적인 불통 지도자로 꼽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맞수로 붙은 탓이다. 양국 정상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건 민족적 자존심이다. 그러나 쓸데 없는 자존심 싸움은 오롯이 국민의 손해로 이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