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서윤 기자 = 국제축구연맹(FIFA) 비리의 ‘중심축’ 제프 블라터(79·스위스) 회장이 5선에 성공하면서 스포츠 외교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방전이 날로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블라터 회장의 당선에도 미국과 유럽은 FIFA 내 비리를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압박하고 있는 반면, 월드컵 개최 예정지인 러시아와 중동은 공개적으로 블라터 회장을 적극 지지하면서 갈등이 증폭하고 있다.
미국 사법당국 관계자는 블라터 회장 당선된 다음 날인 30일(현지시간) AP통신에 “FIFA 비리 사건과 관련해 더 많은 기소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현재 이미 기소된 잭 워너(72) 전 FIFA 부회장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월드컵 유치를 돕는 대가로 1000만달러(약 111억원)를 건네받는 과정에서 이 돈이 FIFA 계좌를 통해 전달될 수 있도록 승인한 고위 관계자가 블라터 회장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수사의 칼끝이 블라터 회장에게 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월드컵 본선 티켓 13장을 가진 유럽의 강호들이 불참하면 흥행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남미 일부 국가도 월드컵 보이콧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러시아 월드컵이 그간 우승컵을 나눠 가져온 유럽과 남미 없이 ‘반쪽 행사’로 치러질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UEFA는 다음 주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독일 베를린에 모여 월드컵 보이콧이나 FIFA 탈퇴 등의 대응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BBC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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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회사 스포츠코프의 마크 가니스 사장은 AP통신에 “블라터의 지지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카타르 정부, 80∼90개 소국에 불과하다”며 “UEFA가 월드컵을 보이콧하거나 FIFA에서 떨어져 나가고 남미 강호들이 동참할 경우 차기 월드컵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이나 아시안컵 수준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국 왕실도 FIFA에 채찍을 꺼내 들었다. 영국 왕위계승 서열 2위이자 잉글랜드축구협회(FA) 명예회장을 맡은 윌리엄 왕세손은 이날 영국 런던에서 열린 아스널과 애스턴 빌라의 FA컵 결승전에 앞서 “스폰서와 지역축구연맹 등 FIFA를 후원하는 사람들이 FIFA의 개혁을 압박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FIFA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된 데이비드 길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사장이 블라터 회장 연임에 관한 항의의 의미로 곧바로 사임한 것에 대해서도 ”FIFA 집행위에서 물러난 그의 결심을 칭찬한다“고 말했다.
결승전을 함께 참관한 그레그 다이크 영국 축구협회 회장도 “블라터 회장이 다시 당선됐지만 사퇴 압력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이라며 “우리만 월드컵을 보이콧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지만 나머지 유럽 국가가 보이콧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도 동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블라터 회장은 당선 직후 스위스 RTS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미국과 UEFA가 정치적 계산 하에 FIFA 연례총회를 방해하기 위해 FIFA 간부 체포 시기 등을 결정한 것”이라며 “나는 모두를 용서하지만 결코 잊지는 않겠다”고 역설했다. 블라터 회장은 “미국이 2022년 월드컵 개최를 희망했지만 무산됐고 영국도 2018년 월드컵 개최를 하지 못하게 됐다”면서 “(FIFA 총회 직전 벌어진 간부들의 체포작전에) 냄새가 많이 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도 블라터 회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미국 검찰의 FIFA 비리 사건 개입을 맹비난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블라터 회장의 5선을 축하한다는 전보를 보내 그를 지지했다. 쿠웨이트 출신의 세이크 아마드 알 파드 알 사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회장 역시 최근 인터뷰에서 “FIFA 간부 전격 체포는 할리우드 스타일”이라며 미국에 날을 세웠다.
FIFA는 오는 7월 2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2018 월드컵 예선 조 추첨 행사를 연다. 이번 비리 스캔들이 대륙 간 외교 갈등으로 비화할 조짐이 보이면서 불참하는 국가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해 독일의 축구 전설 프란츠 베켄바워는 AFP통신에 “FIFA와 UEFA의 극단적인 대립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대화뿐”이라며 “이런 사태는 두 단체는 물론 축구 자체를 위해서도 해롭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