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표는 1984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1991년 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한미합동법률사무소에 들어간 것은 1994년이다.
이 대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법조계에 뛰어들었다"며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돼 일으킨 동학혁명에 집안 대부분이 참여해 부친 때까지 피해를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시프린스호 사고로 잘나가던 변호사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된다. 시프린스호는 1995년 전남 광양항에서 원유를 하역하다가 A급 태풍 '페이'를 피하기 위해 출항했다. 하지만 이 배는 전남 여수 소리도 앞에서 좌초해 원유 5035톤을 유출했다.
시프린스 사건 탓에 인근 어민은 735억원에 이르는 피해를 봤으며, 보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 심사를 거쳐 보상된 실제 액수는 503억원에 불과했다.
이 대표는 "실제 어민들에게 배당되는 액수는 10%도 안 된다"며 "이는 피해보상 과정에서 온갖 꼼수가 난무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사고가 발생하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현장조사를 토대로 재판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민 입장에서는 이런 일을 할 엄두가 안 나게 마련이다. 기업 쪽 보험사 역시 어민에게 유리한 자료는 남겨두지 않는다.
이 대표는 "사건 이후 대한법률구조공단으로 옮겨 노동자를 대변하기 위한 일을 시작했다"며 "관련 지식을 얻기 위한 해사법학 공부도 이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1997년 한미합동법률사무소를 나와 한국해양대 해사법학과 석사과정을 밟는다. 2000년에는 인권분야 전문인 법무법인 덕수에 합류했다.
1971년 출범한 덕수는 꾸준히 국내에서 인권분야를 대변해 왔다. 이돈명 및 김찬국, 최병모, 김형태를 비롯한 익히 알려진 인권변호사가 모두 여기서 일했다. 덕수는 2001년 정민법률특허사무소와 합병을 통해 종합법률서비스 토대를 마련했다.
이 대표는 사법연수원 시절 자원봉사 형식으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금융실명제 도입 촉구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 대표는 "처음부터 인권변호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며 "다양한 경험을 거치면서 인권변호사 가운데 독특한 존재가 돼버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