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운다'고 하면 통곡만 생각했는데 이젠 그 '울음'에도 여러 정서가 반영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우는 것에는 '흐느낌'도 있고 '웃으며 슬퍼하는 것'도 있다는 감정을 받아들였다는 것. 이제는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노장의 깨달음이다.
최근 북한의 2인자로 꼽혔던 '장성택의 사형'소식을 취재하고 접하면서 이 단어가 동자승의 '동자승의 도(道) 닦음'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장성택의 숙청 사실이 최종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우리 언론들은 '실각설'에 속보전을 벌였고 결국 사형 '예고' 기사까지 쏟아냈다.
그러나 기자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젊은 피 끓는' 김정은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내부 결속을 위해서라도 단행해야 했던 것이 숙청이었다면, 사형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한국 언론에 보란 듯이 더 거친 행보를 보이는 것 또한 어린 정은이 한 선택이지 않을까.
실제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은 1인자인 김정은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평민'인 같은 사람인데 '실각'은 무엇이며 '2인자'는 또 무엇이냐"고 반박했다.
장성택을 2인자로 키운 것도 한국의 언론이며 조금 더 오버하자면 사지에 몰릴 대로 몰린 장성택을 형장의 이슬로 남긴 데 한국의 언론도 일조한 셈이다.
북한체제의 비(非)정상성을 여기서 더는 논하지 않겠다. 세계 최악의 폐쇄국가인 북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북한 기사 상당수가 완벽한 사실확인이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의 조급성은 북한 뉴스를 접근하는 방식이 제대로 된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취재에 '절제'를 가미하라는 말이 아니다. 가십거리쯤으로 노골적 기사를 생산해 내는 일부 언론이 펜을 놀리고 키보드를 두드릴 때 약간의 '감정적 절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