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석 여주시장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60년대 초쯤 될 것이다.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이라 그런지 그때의 겨울은 지금에 비하면 유독 더 추웠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겨울에 온전하게 형태 보전된 양말을 신고 다니는 친구들이 몇이나 있었을까 할 정도로 두 겹, 세 겹 기우고 또 기우고 종국에는 출처불명, 아버지 양말 반쪽이 내 것에 붙어와 있었다.
옷을 자세히 보니 화학솜이 두둑이 들어간 최신 유행의, 요즘 학생들이 입는 고가의 거위 솜털 패딩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가치에 있어서는 비슷한 등급의 그런 잠바였다.
그래도 맏형이랍시고 동생들한테 미안했던지, 나는 좋아도 좋은 티를 못 냈던 것 같다.
암튼, 난 다음날 등굣길에 새로 산 잠바를 입고 갔다. 무명 솜을 넣어 만든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고 맵시도 잘 빠진 것이 따듯하기까지 하니 남극에 있어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딱 하루였다. 나는 그날 딱 하루만 새 잠바를 입었다. 어머니한테 된통 혼이 나서도 더 이상 그 옷을 입지 않았다. 분명 큰 아들이 추위에 떨지 말라고 수개월 동안 한 푼 두 푼 모아서 큰맘 먹고 장만한 옷인데 안 입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자식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싶다.
나중에야 어머니한테 그 이유를 말씀드렸지만, 그땐 설명할 방법이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와 함께 중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가난했다. 이 가난도 현재의 잣대로 보니까 가난이지 보편화된 가난은 가난이 아니라 불편한 일상이고 창피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시골에선 보기 드문 새 옷을 입고 학교에 갔을 때, 오히려 내가 창피함을 느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색했고 부러움에 나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길이 거북했다. 하굣길도 영하로 떨어진 날씨 탓에 잔뜩 어깨를 움츠린 친구들 곁에서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떼어내기라도 하듯 다시는 새 잠바를 입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왜 그랬을까?
어린 나는 답을 얻지 못 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해 보면 그건 양심이었던 것 같다. 내가 속한 작은 공동체에 대한 양심.
지금 우리는 휩쓸려 다니듯 무작정 유행을 쫓는다. 본격적인 겨울을 앞두고 1~2백만 원이나 하는 외국산 고가의 패딩 잠바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한다. 꼭 고가의 제품이 아니더라도 중·고등학생들의 겨울 교복처럼 된 아웃도어 패딩 잠바도 몇 십만 원은 기본으로 줘야 살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에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도미노 넘어가듯 너도나도 ‘왜’라는 자기성찰 없이 집단적인 유행 열풍에 앞장서 합류되고 만다.
그렇게 최신 유행의 고가 패딩을 입은 ‘나’에겐 같은 상표 또는 비슷한 등급의 그것을 입은 ‘우리’외엔 아무도 없다. 또한 말없이 마음의 상처를 오랫동안 간직하게 될 친구들이 있다는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돈이 없어 몇 만 원 짜리 잠바라도 간신히 살 수 있는 친구들, 부모 등골 휘는 줄도 모르고 협박성 보채기로 며칠을 졸라 겨우겨우 또래 동급의 무리에 속하게 된 친구들. 여기선 부모, 학생 모두가 분별없는 유행의 피해자들이다.
찬바람 속에서도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풍경이 아름다운 건, 보는 이의 몸과 마음이 따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강한 비·바람을 동반하고 차디찬 겨울이 코앞에서 출동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아무리 멋진 눈꽃이 피고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 연하장 그림처럼 포근한 겨울을 선사할지지라도 내 옆의 누군가는 뼈 속까지 싸늘한 추위일 뿐이다.
금전이든 마음이든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공감만이 세찬 겨울바람을 훈풍으로 돌려 세우고 멋진 겨울 풍경을 다 같이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공동체의 힘이고 희망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