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만처럼’은 나일론으로 대한민국 섬유산업의 새로운 시대를 연 ‘아이디어 뱅크’,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역동적인 삶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소설 형식을 빌려 재구성한 것이다.
이원만은 1953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나일론’을 소개해 의생활 혁신을 이끌어낸 ‘한국 섬유공업의 기수’, ‘수출한국의 선구자’였다. 기업인이면서 제6~7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한국경제의 성장을 위해 애쓴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원만은 서른 살이 되기 전 1933년에 일본 땅을 밟아 신문배달을 하며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끈기 있고, 비상한 아이디어가 넘쳤던 그는 1935년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세워 광고모자(일할 때 쓰는 모자로 공장의 이름이 박혀 있고, 챙이 달려 업무효율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로 사업에 성공했다.
사업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이원만은 가장 먼저 일본에서 입지가 약한 재일 동포들을 위해 경제동우회를 만들었다. 사업하는 동포들의 자금이 윤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신용조합을 만들었고, 물심양면으로 동포들과 나라를 위해 애썼다.
1952년에 이원만은 꿈의 섬유를 만났다. 강철처럼 질기고 윤기가 있으며 벌레도 먹지 않는 ‘기적의 섬유’ 나일론이었다. 그는 1953년에 나일론을 국내에 소개했다. 금세 구멍이 나던 천연섬유를 빨래하고 바느질하던 부녀자들은 나일론 덕분에 그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그가 1957년에 세운 국내 최초의 나일론 공장 한국나이롱주식회사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국내뿐 아니라 홍콩, 이란, 아프리카, 미국, 동남아 같은 해외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이원만은 정치에 기업가 정신을 접목시켜 ‘수출 대한민국’을 향한 열정을 피워냈다. 그는 사업가로 수출 산업에 일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정치인으로서 직접 나라의 수출 산업을 키워냈다. 농공병진(農工竝進)하자는 그의 주장은 구로동에 수출산업공업단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7년에 완성된 수출산업단지는 섬유류, 플라스틱, 피혁, 전자기기, 소공구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수출산업을 이끌었다.
그 밖에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나무로 되어 있던 전봇대가 시멘트로 바뀌고, 가정과 업소마다 프로판가스가 도입됐다. 그의 수많은 아이디어 중 특히 가발은 드라마에 머리를 파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단골로 등장할 정도로 당시 수출 산업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사업가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이원만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물음표를 달았다. ‘양말은 왜 천연섬유인 면으로만 만들어야 할까?’ ‘나무나 석탄 외에 다른 연료는 없을까?’ 등등. 동시대 사람들로서는 엉뚱하고 이상하다고 느낄 법한 생각들을 했다. 하지만 이원만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들을 전달할 때, 그만이 가진 특유의 유머를 활용해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의원시절 의장에게 의견을 전달할 때도 그러한 능력은 십분 발휘되었고 그 결과 산업 발전 정책에 반영되었다.
이원만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 사람들에게 좋고 이롭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추진력 있게 해나가는 배짱 있는 사람이었다. 일본에서 조센징이라고 핍박하고,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돈을 번 반쪽발이라며 견제할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그런 뚝심들이 기업과 정치를 할 때 리더십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는 신용도 중요시 여겼다. 한일경제단교로 삼경물산이 어려울 때, 그는 이익보다 신용을 챙겼다. 거래처와 신용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집을 팔아 주문한 물량을 지키고, 손해액을 메우는 사람이었다.
전경련은 “창의적 아이디어, 상상력을 기존의 산업과 융합하여 새로운 시장과 산업을 재창출해내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창조경제 시대에 사람들이 당연히 생각하는 오래된 가치관들을 뒤집고,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기존의 사업과 접목시켰던 이원만이야말로 창조경제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 청소년들이 꼭 배워야 할 기업가”라고 설명했다.
박시온 저, 나공묵(전 코오롱그룹 부회장, 현 코오롱그룹 상임고문) 감수, 232쪽, 1만 2,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