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1954년 개정된 헌법에서는 독립된 국가기관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설치했고, 마오쩌둥은 그해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다시금 주석으로 선출됐다. 부주석은 주더였다. 이후 1959년 대약진운동의 참담한 실패로 인해 마오쩌둥은 스스로 정치적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다.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인물은 류샤오치였다. 하지만 당시는 직위를 떠나 마오쩌둥의 권위와 영향력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것이었고,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여전히 마오쩌둥이었다.
류샤오치는 국가주석 취임후 사유재산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며 중국경제에 활력을 불러넣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같은 정책들이 사회주의 이념에 반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문화대혁명을 촉발시켰다. 류샤오치는 1966년 실각했고 이후 국가주석은 공석으로 유지됐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혁은 종결됐고 2년여의 혼란끝에 1978년 제11기3중전회를 통해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실권자로 전면에 등장했다. 문혁발발이후 17년동안 공석으로 비워졌던 국가주석직은 1983년 전인대가 리센녠(李先念)을 선출하면서 비로소 채워졌다. 이때부터 국가주석직의 5년임기가 실현되게 된다.
1988년에는 혁명원로 양샹쿤(楊尚昆)이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부주석은 역시 홍군 지휘관이었던 왕전(王震)이었다. 1993년에는 장쩌민(江澤民) 공산당 총서기가 국가주석에, 경제통인 룽이런(榮毅仁)이 국가부주석에 각각 선출됐다. 국가주석은 중국헌법상 최고권력기구였지만 사실상 최고지도자는 여전히 덩샤오핑이었다.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야 국가주석은 명실공히 헌법이 정한대로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덩의 사후 장쩌민은 국가주석, 공산당 총서기, 군사위 주석을 겸임하면서 현재의 중국 권력구도를 정립했다. 1998년에는 후진타오(胡錦濤)가 국가부주석에 오르면서 차기 국가주석직을 예약했다.
예상대로 2003년 새로운 국가주석으로 후진타오가 선출됐다. 당시 부주석은 장쩌민의 오른팔인 쩡칭훙(曾慶紅)이었다. 그리고 5년후인 2008년 새로운 부주석으로 시진핑(習近平) 현 국가주석이 선출됐다. 또다시 5년후인 올해 후진타오가 물러나고 시진핑이 국가주석에 올랐으며 부주석에는 리위안차오(李源潮)가 선출됐다. 이같은 관례로 볼때 앞으로 5년후인 2008년 나타날 새로운 부주석이 시진핑을 이을 차기 국가주석 내정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