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통 현장증언> 정해익 두산인프라코어 옌타이 법인장“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임을 직접 목격하고는…”

2012-02-25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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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1993년 8월28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에 도착한 후 비행기를 갈아타고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 도착하자 37년 인생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푹푹 찌는 공기와 높은 습도에 가슴이 턱 막히는 듯 했다. 당시 우한은 전통적인 공업도시이자 후베이성 최대규모의 도시였지만 고층건물 하나 없고 자동차도 몇대 보이지 않아 그야말로 우리나라 1970년대의 서울을 연상케 했다. 두산인프라코어 옌타이법인장인 정해익 전무는 당시만 해도 그가 인생의 1/3을 중국에서 보낼 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한(武漢)공항에서 차를 타고 세시간 가량 비포장도로를 달려 황스(黃石)에 도착했다. 차창 밖에는 끝없는 논이 펼쳐졌으며 소를 몰고 농사를 짓는 광경이 이어졌다. 도착한 곳은 황스(黃石)의 한 트랙터공장(湖北省拖拉机厂)이었다. 정해익 당시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과장은 이 회사와의 합작을 모색하기 위해 이 공장에서 1개월여 체류하며 합작가능성을 타진했다.
중국측 회사가 내준 숙소에는 에어컨도 없었으며 바닥에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공장내 국제전화가 되는 전화기는 단 두대밖에 없었고 팩스, 복사기 등이 턱없이 부족했다. 말도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았으며 공장의 작업환경이나 생산성은 무척이나 열악했다. 어린시절 한학자이신 할아버지로부터 “미래에는 중국이 세계를 주도해 나갈 것이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서 일할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만큼 중국에 대해 호감이 높고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그지만 그 곳의 열악한 생활환경에는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당시 중국의 아파트 건설현장은 그에게 “중국은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그가 목격한 아파트 건설현장은 온통 작업자들로 가득했다. 모두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있었다. 4~5m 땅을 판 다음 콘크리트 구조물을 집어넣는 기반작업을 모두 사람의 힘에 의지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임금은 10위안가량이었다. 그는 그 장면을 보고 “인건비가 조금만 올라간다면 기계를 구입해서 건설작업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중국 경제발전과 더불어 굴삭기 시장은 급팽창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졌다.

황스의 업체와의 합작은 7개월의 협상이 이어졌지만 서로의 조건이 맞지않아 결국 무산됐다. 대우중공업은 합작이 아닌 단독진출로 방향을 틀고 법인설립지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지리 및 투자환경, 장래성등을 고려하여 산동성 옌타이(煙臺)로 결정했다. 한국에서 해외AS를 담당하며 중국에서의 비즈니스를 준비하던 정 전무는 1996년 1월 정식발령을 받고 옌타이법인 생산관리팀장으로 나와 공장건설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굴삭기시장은 연간 2000대규모에 불과했지만 공격적으로 연산 3000대의 공장을 기획했다. 2400대는 한국과 동남아지역으로 수출하고 600여대는 중국시장에 판매하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리고 1996년 6월28일 옌타이공장이 완공됐다. 중국사업에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던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도 준공식에 참석했다. 당시 대우그룹은 중국을 미래의 제2 본사로 설정해 두고 있었다. 굴삭기업체로는 1996년 일본의 고마츠와 함께 최초로 중국에 진출한 케이스였다. 초창기에는 순조로웠지만 1997년 IMF구제금융과 아시아 금융위기의 화마가 덮치며 위기가 찾아왔다. 해외에서의 수출오더가 뚝 끊겼고, 야적장에는 판로를 찾지 못한 굴삭기 제품들이 쌓여갔다. 거기에다 1999년에는 대우그룹 해체사태까지 겹쳤다.

하지만 1998년 9월부터 시장이 풀리기시 시작했고, 중국인들이 직접 현금을 가방에 담아 옌타이공장을 찾아와서 굴삭기를 사가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공장을 둘러보고 한대에 70만위안인 굴삭기를 현금으로 구입했다. 일주일에 10~20대씩 팔려나갔으며 회사에는 활기와 현금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2000년까지 옌타이법인은 순항을 거듭한다. 정 전무는 주재원 임기 4년이 끝나가자 귀국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크아웃절차에 들어가있던 대우중공업 본사는 주재원들을 교체할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정전무의 귀임은 무기한 연기됐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 전무는 파격적인 AS정책과 당시 중국내 누구도 시행하지 않은 할부판매 정책을 펴며 승부수를 던졌다. 굴삭기는 비포장길을 거쳐 땅을 파고 돌을 캐는 등 고난도의 작업을 하는 만큼 고장이 잦다. 중국의 굴삭기업체로는 최초로 정기점검을 실시했으며 고장신고가 들어오면 AS요원을 비행기를 태워서라도 현장에 급파해 수리를 하게끔 했다.판매한 제품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입소문이 났고, 획기적인 할부판매제도로 중국인들은 앞다퉈 대우중공업의 굴삭기를 구매했다. 더구나 회사에서는 제품 품질관리에 만전을 기하는등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마침내 2002년 대우중공업은 세계적인 업체인 개터필러, 코마츠, 히타치등을 뛰어넘어 중국 굴삭기 업계 1위에 등극한다.

그리고 2005년 대우중공업은 두산그룹에 인수돼 두산인프라코어로 사명이 바뀌었다. 정 전무는 2007년 법인장에 올라섰다. 17년째 옌타이에서 근무하고 있는 만큼 지역사회에서도 그를 비중있는 인사로 대하고 있다. 2009년에는 산동성 인민대표대회에 초청받아 참관했으며, 2010년에는 옌타이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됐고 2011년에는 산둥성 명예공민이 됐다. 지난해에는 경제일보 등으로부터 '중국경제100명걸출인물'에 선정됐으며 지난 9일에는 옌타이 개발구로부터 특수 공훈인물상을 받았다.

◆정해익 법인장 약력 ▲1956년 3월 서울 출생 ▲경희고등학교 ▲한양대 산업공학과 ▲1981년 대우중공업 입사 ▲1996년 대우중공업 옌타이법인 생산관리팀장 ▲2005년 두산인프라코어 옌타이법인 생산관리팀장 ▲2008년 옌타이법인 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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