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17개국의 화폐금융정책을 총괄하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수장이 8년만에 바뀌었다. 이에 따라 재정위기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유로존의 정책 노선이 새롭게 제시될 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31일 외신에 따르면 ECB는 11월 1일자로 지난 8년간 지휘봉을 잡아 온 프랑스 출신 장 클로드 트리셰 총재 후임으로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출신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64)를 새 총재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지난주 드라기 총재 내정자는“ECB는 정부의 정책이 실패했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밝혀 “중앙은행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트리셰 전 총재와는 사뭇 다른 정책을 펼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먼저 드라기는 전임 트리셰 총재가 지난해 5월부터 시행해 총 1740억달러에 이른 유로존내 위기 국가들의 국채 매입 정책을 이어갈 지 주목된다. 일단 드라기는 국채 매입 정책을 당분간 이어갈 것이란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트리셰 총재가 드라기와의 면담 후 “신임 총재가 국채 매입과 관련해 어떠한 정책 변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드라기 본인도 “ECB는 금융시장이 마비되는 것을 피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T)는“국채 매입이 재정 위기로 흔들리고 있는 이탈리아를 도왔기 때문에, 드라기가 ECB 총재로서의 독립성을 보여주기 위해 고국 이탈리아에 어떠한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밝혔다.
ECB의 국채매입 정책은 당시 내부 분란을 일으켰다. ECB 본연의 임무가 물가 안정화에 있다며 독일 등 일부국가 대표와 소장파들이 대거 반발했기 때문이다. 차기 ECB 총재로 물망에 오르던 악셀 베버 전 독일 중앙은행(분데스방크) 총재는 물론 독일 출신 위르겐 슈타르크 ECB 집행이사도 이 내홍 때문에 ECB를 떠났었다.
드라기 총재는 당장 오는 3일 있을 EU 23국 대표위원회 모임에서 기준 금리 인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금리 인하 가능성이 높았던 지난달 모임에서 현행 1.5% 금리를 유지했던 ECB는 새 총재를 맞아 이번에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트리셰 총재 등은 최근 “경제 하강 위협이 크다”며 “ECB 집행위원들이 금리 인하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반면 취임한지 사흘 만에 드라기가 금리 인하를 단행하는 것은 무리이며, 시장도 11월 금리 인하를 점치지 않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캐피널 이코모닉스의 제니퍼 맥퀀 유럽 이코노미스트는“경제 지표들은 경기 부양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ECB가 11월에 금리 인하를 단행할 암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전망의 배경에는 지난달 26일 유럽연합(EU) 정상상회의에서 유로존 위기에 대한 포괄적 해결 방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단 급한 불은 껐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분석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자리에서 정상들은 그리스 국채의 50%를 삭감하고 유럽재정안정화펀드의 규모를 2,500억유로에서 1조유로 규모로 늘리기로 합의한 바 있다.
한편 신임 드라기 총재는 로마 라 사피엔자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박사학위(1976)를 받았다. 이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대학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4년~1990년 세계은행 이사, 1991년부터 10년간 이탈리아 재무부 국장(director general)을 역임했다. 골드만삭스에서 이사로 약 3년을 일한 뒤 2006년부터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로 부임했다.
당시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안토니어 파지오 총재의 내부자 거래 의혹으로 신뢰가 추락한 상황이었으며, 드라기 총재는 과감한 개혁조치로 이탈리아 은행시스템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넘는데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를‘수퍼 마리오’로 부르는 이유다.
정치적으로는 중립적이며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트리셰 총재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분석된다.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경제학 교수 출신 답게 보다 이론에 입각해 분석적인 정책을 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워싱턴(미국)= 송지영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