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의 주무대인 전남 남원의 광한루원. 500년 이상된 고목들이 넓고 짙게 풍치를 더해준다. |
△‘소리’와 ‘이야기’가 있는 고장. 남원
광한루는 춘향이와 이몽룡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한층 유명해졌지만 여기엔 잘 알려지지 않은 ‘황희와 정인지, 장의국’ 세분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져 오고 있다. 이 지역 호족 출신이었던 황희가 고향으로 내려와 지리산 자락 섬진강 지류인 요천 변에 광통루를 세운 것이 광한루의 시초다. 이후 세종 16년에 중건되고 정인지에 의해 ‘광한루’라 개명됐다. 선조 때 남원부사 장의국이 요천의 강물을 끌어드려 인공호수를 만들고 3개의 섬을 조성하여 만든 것이 광한루원(廣寒樓苑)이다. 광한루의 가을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느림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을 산책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멈춰 선 듯 하다. 500년 이상 된 거목과 넓은 정원은 한국 정원의 백미라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의 화려함이 아닌 고요한 고택(古宅)에서 풍기는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옆 요천 건너편에는 ‘춘향테마파크’가 있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촬영세트장을 비롯해 춘향전을 테마별로 재현해놓은 놀이 공간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다.
남원은 춘향가, 홍보가 등 판소리 동편제의 본고장이기도하다. 이러한 판소리의 전통을 보존-계승하기 위해 운봉읍 회수리 일원에 조성된 국악의 성지는 국악선인 묘역과 전시관, 체험관, 독공실 등이 있어 우리 국악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다. 1층 전시관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기원부터 판소리의 변천과정을 담아내고 있어 판소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 2층 전시실에선 시립 국악단이 상설 공연을 펼친다. 단체 방문객을 위한 국악프로그램과 전통 문화체험을 해 볼 수 있다. 이곳 마당에서 해질녘 지리산 단풍을 올려다보면 영락없이 한 폭의 가을 수채화다.
전남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 섬진강을 둘러싼 가을 풍치를 만끽할 수 있다. |
△ 강길 따라 철길 따라. 곡성
섬진강은 영산강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서정적인 강으로 꼽힌다. 또 주변 마을 살림을 살찌운 풍요로운 강이기도 하다. 이 강을 따라가는 길에 마주치는 조용한 고장 ‘곡성’이 있다.
남도의 곡성은 청정지역이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과 강을 잇닿은 지리산 자락은 운치를 느끼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섬진강 기차마을을 가면 증기기관차와 레일바이크를 직접 타볼 수 있다. 전라선 복선화 공사로 폐선이 된 구 전라선 구간을 활용해 312명이 탑승할 수 있도록 관광용 증기기관 열차를 제작, 운행하고 있다. 침곡~가정역까지는 레일바이크도 운행 중이다. 증기기관차가 지나간 길을 따라 5.1km 철로 위로 페달을 구른다. 어린이 가족과 연인 나들이객들에겐 단풍 천국과 같은 곳이다. 특히 섬진강 레일바이크는 강원도 정선의 그것과 달리 섬진강을 둘러싼 가을 풍치를 만끽하기엔 좋은 코스다. 아름다우며 길목마다 이야기가 흐르고, 멈추고 싶은 풍경이 있는 곳이다.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의 오산 사성암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례 평야. |
△ 삼대삼미의 고장. 구례
구례는 섬진강과 지리산이 품은 수려한 자연환경의 고장이다. 또 삼대삼미의 고장이다. 삼대는 지리산, 섬진강, 구례 들판이고, 삼미는 수려한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을 말한다. 예로부터 지리산을 불교문화의 요람이라고 했다. 그 중심엔 화엄사가 있다. 늦가을 단풍으로 절정인 화엄사의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빛바랜 단청 목조건물과 이끼 낀 돌탑에서는 세월의 진득함이 묻어난다.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사찰내부엔 각황전을 비롯해 국보 4점과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돼 있어 작은 야외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국보 제 67호인 각황전은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그 앞에는 국보 제 12호인 거대한 석등이 서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섬진강을 경계로 화엄사 건너편에는 구례 9경 중 하나인 사성암이 있다. 이전엔 오산 등산로를 통해 겨우 갈수 있었으나 최근엔 사성암 바로 밑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게 했다. 531m의 오산은 자리모양의 호젓한 산이다. 높지 않고 비경이 많아 가족 등반이나 단체 소풍코스로 사랑받는 산이다. 사성암은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오산암으로 불리다가 이곳에 원효, 도선, 의상, 진각 등 4명의 성인이 수도했다고 해 사성암이라 불린다. 사성암을 처음 본다면 그 위태로움과 장엄함에 입이 벌어진다. 특히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지리산 자락은 마치 지리산 자락을 앞마당처럼 펼쳐 놓은 듯하다.
사성암 약사전에는 원효대사가 바위로 손톱을 새겼다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하지만 암자에 가려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간혹 암자를 개방해 등산객들에게 개방한다고 하니 운이 좋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성암을 뒤로하고 오산의 정상에 오르면 또 하나의 절경이 있다. 섬진강과 지리산을 품은 구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 동안 발길을 멈추고 굽이치는 섬진강과 길게 뻗은 지리산 자락은 한참이나 눈길이 갈 수 밖에 풍경이다.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에 위치한 삼성궁 전경. 숲을 뒤로 하고 정성 들여 쌓은 돌담과 석축 솟대가 신비감을 더한다. |
△ ‘토지’의 땅, 하동
섬진강 끝자락 하동에는 박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 마을이 있다. 최근에는 소설을 배경으로 그대로 재현해 놓은 최참판댁이 단장을 하고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평사리 일대에는 지리산 능선이 남으로 내달린 끝에 우뚝 선 성제봉 아래로 넓은 평야와 섬진강가의 동정호까지 펼쳐져 있다. 평사리가 있는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혁명에서 근대사까지 한민족의 대서사시인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진 최참판댁은 최근 3000여평 터에 한옥 14동으로 단장한 대저택이다. 마치 소설 속으로 빠져드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최참판댁 입구에서 갈라진 도로를 따라 30분가량 산길을 오르면 산성 아래 펼쳐진 섬진강과 평사리의 풍광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발길을 돌려 지리산 쪽으로 옮기면 청학동과 삼성궁이 나온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거하기도 했던 청학동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청학동 마을 다른 편에는 삼성궁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고장 출신인 강민주(한풀선사)가 고조선 시대의 소도를 복원, 민족의 성조인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배달민족 성전이다. 민족의 정통 도맥인 선도를 지키고 신선도를 수행하는 민족 도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선조들의 정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없이 이어진 돌담과 돌탑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의지가 어디까지 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지리산 자락의 남도 단풍 나들이는 눈과 귀는 물론 우리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한민족 고유의 단풍놀이’에 다름 아니다.
(아주경제 강경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