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린성은 중국 동북지역의 내륙 중심부에 위치하며 중국에서 동해 및 태평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두고 북한과 접경해 있다. 때문에 북중 경협의 전면에 나서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때문에 왕루린 성장은 북중경협의 방향은 물론 실무현황까지를 훤히 꿰고 있는 인물로도 볼 수 있다. 왕 성장은 지난 7월 장춘(長春)에서 열린 북한의 나선특별시와 공동개발관리사업위원회 제1차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왕루린 성장은 조선 나선시 책임서기인 림경만 일행과 회담을 갖고 ‘중조나선경제무역구(2011~2020년)계획틀에 관한 협의’를 체결했다. 왕 성장은 “지난해 작년 중조 양국 최고지도자들끼리 교감했던 공감대에 따라 두 나라는 ‘조선 라선경제무역구와 황금평, 위화도경제구 공동개발공동관리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며 “이는 양국 경협의 중대한 돌파구며 지린성과 라선시의 경제협력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53년 4월 허난성 푸양에서 태어난 왕루린은 문화대혁명의 풍파에 휘말려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농촌지역으로 하방되야 했다. 그는 지린성 우쑹(撫松)현 루수이허(露水河)진을 택했으며 이때부터 그와 지린성과의 인연은 시작된다.
그는 지식청년으로 2년이라는 짧은 기간만을 농업에 종사한 후 지린성 루수이허의 임업국에 들어갔다. 작은 ‘진’에 불과한 곳이었지만 산이 많고 산림자원이 풍부한 곳이었기에 임업국은 일손이 달렸다. 그는 성실했고 당성이 강했기에 1973년 당 간부들의 추천을 받아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그는 루수이허진 임업국에서 공청단 지부 부서기를 지낸다. 작은 지역이었던 만큼 공청단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이 경험은 훗날 그가 공청단파 정치인으로 도약하게 되는 밑거름이 된다.
1975년 지린성이 운영하는 청년간부반에서 2개월여 연수를 받은 그는 뛰어난 성적을 보였고, 이로 인해 지린성 성정부로 끌어올려지게 된다. 그는 농림판공실에서 9년여를 근무했다. 이후 그는 1984년 지린성 첸궈(前郭)현 바랑(八郞)향의 서기로 부임받았고, 이듬해에는 첸궈현 부현장이 됐다.
1986년에 공청단 지린성 부서기로 자리를 옮긴다. 공청단 지린성은 훌륭한 정치인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공청단 지린성 서기를 맡았던 두칭린(杜靑林)은 현재 통일전선부 부장이고, 그의 후임자인 전철수(全哲洙, 조선족)는 통일전선부 부부장 겸 전국공산연합회 제1부주석이다. 두 부장이나 전 부부장 모두 2012년 승진기용될 가능성이 높다.
전 부부장 후임자가 바로 왕루린 성장이다. 왕루린의 후임 공청단 지린성 서기는 마쥔칭(馬俊淸)으로 현재 지린성 부성장으로 왕 성장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왕 성장은 1987년부터 5년동안 공청단 지린성 서기를 역임했고 이후 지린성 쓰핑(四平)시 부서기로 이동했다. 1992년에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지린성 퉁화(通化)시위원회 부서기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시장, 서기로 1998년까지 근무한다. 이후 그는 지린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서기로 보임받는다.
옌볜자치주 서기를 지낸 인물 중에도 유명한 정치인이 여럿 포진해 있다. 우선 1986년에 자치주 서기로 임명됐던 리덕수(李德壽, 조선족)는 국가민족위원회 주임까지 올라갔고, 그의 후임자인 장더장(張德江)은 현재 부총리이다. 장더장의 후임자로 1996년 서기에 임명된 인물은 쑤룽(蘇榮)으로 현재 장시(江西)성 서기다.
이후 왕루린은 2001년 지린성 상무위원을 거쳐 2004년 장춘 서기를 지냈으며 2009년 성장에 올라섰다. 그가 대리성장에 임명되던 2009년 12월 그는 지린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왕민(王珉) 전 서기와 한창푸(韓長賦) 전 성장이 이뤄낸 새로운 사업성과들을 바탕으로 지린성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지린성 상무위원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이어 그는 “인민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이며 인민의 근본이익을 지키기 위해 힘 쓸 것”이라면서 “수시로 인민과 접촉하고 대화해 사업의 성과가 인민에게 돌아가도록 해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앞당겨내겠다”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