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46>뤄즈쥔 – “반드시 장쑤성을 가장 번영토록 하겠다”

2011-08-2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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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성장이었을 때는 잠을 잘 시간이 없었는데, 서기로 올라서고 난 후로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뤄즈쥔(羅志軍) 장쑤(江蘇)성 서기는 지난 3월 한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뤄즈쥔은 장쑤성에서만 무려 16년째 근무하고 있다. 이처럼 장기간동안 한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치인은 뤄즈쥔이 유일하다. 이는 그의 커리어를 단순하게 해 향후 정치이력에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는 장쑤성을 중국에서 가장 잘 살고, 가장 선진적인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다.

뤄즈쥔은 공청단파 핵심 정치인이다. 게다가 공청단파의 대표주자인 리위안차오(李源朝) 중앙조직부장과 무척 가까운 사이기도 하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비롯한 공청단파는 뤄즈쥔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높은 기대를 걸고 있다. 후 주석이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올라선 2002년 이후 제창한 것은 ‘과학발전관’과 ‘조화사회’다. 하지만 아직까지 과학발전관을 구체적으로 완성시킨 도시나 지방정부는 없다. 다만 후 주석의 과학발전관에 가장 근접해 있는 곳이 장쑤성이다. 때문에 뤄즈쥔은 후 주석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가 2010년 12월 량바오화(梁寶華)를 대신해 장쑤성 서기로 승진할때 당시 공산당 중앙에 과학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를 내려보내달라고 요청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장쑤성의 경제구조를 과거의 굴뚝산업위주에서 고부가가치 기술 자본 집약적 산업으로 변모시키는게 지상과제인 뤄즈쥔으로서는 자신을 도와 과학발전론을 현실화시켜낼 수 있는 브레인이 절실했다. 그는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에게 요청을 했고, 리 조직부장은 흔쾌히 리쉐융(李學勇) 당시 과학기술부 부부장을 장수성 성장으로 내려보낸다. 리쉐융은 베이징화공학원 고분자학과를 나왔으며 과학기술부 부부장으로 12년여를 근무해왔다.

뤄즈쥔의 서기승진은 이미 예정돼 왔었지만 리쉐융의 장수성장 발탁은 당시로서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그동안 장쑤성 성장은 내부승진을 시켜왔었으며 장쑤성에는 유력한 성장후보 두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리쉐융의 장쑤성 성장 발탁으로 당시 장수성 부서기였던 자오커즈(趙克志)와 왕궈성(王國生)은 각각 후베이(河北)성과 구이저우(貴州)성으로 발령받게 된다.

중앙정부의 과학계통에서 일해온 리쉐융을 장쑤성으로 내려보낸 의도는 명백했다. 공산당 중앙이 12차5개년규획(2011년~2015년)기간동안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경제구조를 바꾸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하이테크 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장쑤성을 과학발전관의 모범지역으로 만들겠다는 것. 중국의 산업기술은 아직 선진국수준에 못미치기 때문에 이 과제는 상당한 현실적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렇듯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기에 중국에서는 “뤄즈쥔이 잠이 안올 만도 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공청단파의 지원, 특히 리위안차오 조직부장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는 뤄즈쥔은 2012년 열릴 제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장쑤성 서기직을 연임하길 원한다면 정치국위원에 진입하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또한 현재 그의 공산당 내 위치가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기 때문에 중앙위원을 건너뛰어 정치국위원으로 올라서기에도 다소 부담스러워 보인다.

◆”성장률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다”

장쑤성은 중국의 대표적인 부유한 지역에 해당된다. 2010년 GDP는 4조903억위안으로 광둥성의 4조5473억위안에 이어 중국내 2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HSBC의 연구센터은 보고서를 통해 “장쑤성은 2012년에 광둥성을 따라잡고 가장 큰 규모의 성에 올라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뤄즈쥔의 목표는 GDP가 아닌 산업구조조정과 산업업그레이드에 있다. 2011년 3월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뤄즈쥔은 “개혁개방 30년동안 장쑤성은 3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첫번째는 1980년대의 공업화과정으로, 이 기간을 통해 장쑤성은 농업대성에서 공업대성으로 변모했다. 두번째는 1990년대로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개방경제를 완성해 냈다는 것. 뤼즈쥔은 이어 “지금은 세번째 단계로 경제대성(大省)에서 경제강성(强省)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그 핵심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진보에 있으며 단순한 제조를 벗어나 새로운 재화와 용역을 창조해내는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높은 경제성장률은 더 이상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라며 “우리의 목표는 창조력에 있다”고 역설했다.

장쑤성의 12차5개년규획 중에는 창의성이 유독 강조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GDP의 2.5%를 연구개발(R&D)에 투입하며 과학기술의 GDP 공헌률을 60%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같은 방침은 뤄즈쥔이 성장시절부터 장쑤성에서 강조해왔던 목표다. 2008년1월 장쑤성 성장에 오른 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을 때도 그는 과학기술을 강조했다. 2009년 장쑤성 경제공작회의에서 그는 “장쑤성의 과학기술 창조능력은 전국1위며 금융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해낼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과학발전 최종목표는 인민번영"

산업구조조정도 착실하게 진행중이다. 2010년 장쑤성의 신에너지•신소재, 생물기술•의약, 에너지절약, 소프트웨어, 서비스아웃소싱, 물류연계인터넷산업 등 신흥산업의 경제규모는 이미 2조위안에 육박했다. 전년대비 35.8% 증가한 수치다. 장쑤는 신흥산업육성계획을 제정했고, 2012년 6대 신흥산업 매출액이 3조위안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2015년이면 장쑤성의 신흥산업 규모는 5조위안에 달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올해들어 인민의 소득수준 제고를 줄기차게 강조했다. 2011년 장쑤성은 7년동안 인민소득을 두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매년 10%가량의 수입증가를 의미한다. 뤄즈쥔은 “과거 인민소득 증가율이 GDP 증가율보다 낮아왔다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며 “과학기술 창조나 경제성장의 최종목표는 인민의 풍요로운 삶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사분야에서의 개혁도 진행중이다. 장쑤성은 경쟁방식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고 있으며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동안 10만명을 넘는 관료가 배출됐다. 이 중 8840명은 공개경쟁을 벌인 끝에 지도자위치에 올랐으며, 140명의 시장,청장급, 340명의 처장급 간부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제도는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이 전국적으로 확대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뤄즈쥔은 리위안차오가 장쑤성에서 펼쳤던 인사정책을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도덕성과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3월27일 간부대회에서 “간부를 임용할 때 줄을 대거나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은 결코 뽑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어 그는 “국가는 인재로부터 흥하며, 정치나 행정의 기본은 인사”라며 “덕과 재능은 모두 중요하지만 덕을 더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공청단계통에서 17년근무

뤄즈쥔은 1951년 11월 랴오닝(遼寧)성 링위안(凌源)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군에 입대해 인민해방군 북해함대에서 10년동안 근무했다. 이후 1978년 군복을 벗고 베이징의 의료용품공장 공청단 서기로 이동한다. 1980년 뤄즈쥔은 공청단 중앙 산하의 신문인 중국청년보에 간부로 임용된다. 이 곳에서 그는 10년동안 부처장, 부비서장, 사무총장까지 승진한다. 중국청년보에서 일하던 기간에 그는 당시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리위안차오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리위안차오는 1983년부터 1990년까지 중앙서기처 서기를 역임했다.

1990년 뤄즈쥔은 공청단 직속기구인 중일청년교류센터의 부원장이 됐다. 1993년 2월 공청단 중앙 실업발전부 부장이 됐다.

1990년부터 3년동안 공청단 직속기구인 중일 청년교류센터 부원장을 지냈으며 1993년에서야 공청단 중앙서기처에 진입하게 된다. 그의 공청단 중앙에서의 이력은 1995년 공청단 상무위원으로 종료된다. 동시에 1995년에 중국정법대학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리위안차오와 찰떡궁합

이후 그는 44세에 난징시 부시장으로 발령받는다. 50세가 되서도 뤄즈쥔은 난징시 부시장에 머물렀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강력한 후원자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공청단에서 함께 일했던 리위안차오가 2001년 난징시 서기로 부임해 온 것. 리위안차오가 난징에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뤄즈쥔은 난징시 대리시장에 올랐고, 이듬해인 2002년 난징시 시장으로 승진됐다. 비록 한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뤄즈쥔은 각종 모임에서 리위안차오를 극진한 예의로 대했다고 한다.

리위안차오는 2002년 장쑤성 서기에 오른다. 그리고 뤄즈쥔은 2003년 난징시 서기가 됐다. 난징시는 장쑤성의 성도(省都)다. 리위안차오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뤄즈쥔과 함께 난징에서 근무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 과정에서 더욱 깊어진다.

이후 뤄즈쥔은 2008년에 장쑤성 성장에 올랐으며 60세인 2010년에 장쑤성 서기로 발령받았다. 장쑤성 서기 출신 정치인으로는 후이량위(回良玉) 부총리,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이 대표적이다. 이 두명은 모두 현재 정치국위원으로 국가지도자급 반열에 올랐다. 이 밖에도 장쑤성이 배출해낸 정치인으로는 쑤저우(蘇州)시 서기를 역임했던 천더밍(陳德銘) 상무부장과 왕민(王珉) 랴오닝성 서기, 왕룽(王榮) 선전시 서기를 들 수 있다. 뤄즈쥔과 함께 장수성 부서기를 지냈던 왕궈성과 자오커즈는 현재 각각 후베이성장과 구이저우성 성장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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