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중국은 세계 9%도 안 되는 경작지로 세계 약 21%의 인구를 먹여 살리며 세계 식량안보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지난 6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총회에 참석해 주제발표에 나선 한창푸(韓長賦) 중국 국무원 농업부장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예로부터 중국은 식량증산에 힘을 써왔지만 역사상 어느 왕조도 백성들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의 중국은 13억명을 기아에서 해방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한창푸는 “중국은 개도국으로서 농업 생산성을 확연히 제고시켰으며 세계 식량안보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며 “현재 세계 식량안보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협력해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농업대국인 중국의 농업부장으로서 중국을 넘어 세계의 식량안보까지 챙기고 나선 것이다.
◆중국 흉작은 글로벌 인플레 야기
중국의 농업은 세계 경제 측면에서도 중요한 작용을 한다. 중국의 작황이 부진하면 미국, 호주 등으로부터 농산물을 대규모로 수입해야 하며, 이는 세계 곡물수급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고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는 단초가 된다.
올해 초에도 중국의 가뭄과 홍수로 인해 중국 식량 생산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일었다. 이같은 우려를 불식하듯 한창푸 부장은 “올해 중국의 여름수확이 풍작을 거뒀고 특히 겨울밀이 8년째 증산을 기록할 전망”이라며 “가을수확 역시 안정적일 것으로 전망되며 현재 중국 식량 재고가 충분하고 시장공급이 원활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중국의 농업생산성은 매년 높아지고 있다. 난카이대학이 6월 발표한 연구보고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7년연속 식량생산량이 증가했으며 식량자급률은 10년이상 95%이상을 유지했다.
하지만 중국의 소득수준 향상과 육류섭취 증가로 인해 콩, 옥수수 등 사료로 사용되는 곡물의 수요에는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옥수수 작황은 중국의 최대문제로 떠올랐다. 옥수수 생산량은 사료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이는 돼지고기가격에 연동된다. 돼지고기 가격 상승은 중국의 인플레이션에 직격탄을 날렸다. 또한 대두가격 상승은 식용유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하반기 물가불안을 예고하고 있다.
◆"옥수수, 콩 생산성 높일 것"
지난 3월 CCTV와의 인터뷰에서 한창푸는 “중국은 아직 대부분 경작지가 국제표준 이하의 생산성을 보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벼와 밀의 경우는 생산성이 높은 편이지만 옥수수와 콩의 생산성은 낮다”며 “옥수수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378kg에 불과해 미국은 600kg과 큰 차이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한 부장은 “관개시설을 조속히 완비해 현재 36%에 그친 선진경작지 비율을 향후 10년내로 50%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라고 소개했다.
한창푸 부장은 자타공히 중국의 농업전문가다. 그는 일생을 중국의 농업에 매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현재 중국 정부의 최대목표인 물가안정에 농작물의 안정적인 공급은 필수적인 요건이다. 게다가 이미 중국공산당과 국무원이 매년 초 발표하는 제1호문건은 7년째 농업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다. 농업의 중요성이 나날이 강조되고 있는 만큼 한창푸 부장의 경력과 능력은 그만큼 귀하게 여겨지고 있다. 게다가 그는 공청단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현재 중국의 정가를 주름잡고 있는 공청단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측근인사로 분류되는 만큼 내년 열릴 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공청단 중앙에서 16년 근무
한 부장은 1954년 10월 헤이룽장 빈(賓)현에서 태어났다. 헤이룽장성의 후란(呼蘭)사범대를 나온후 1976년부터 빈현의 조직부에서 근무했다. 대학시절 성적이 빼어났으며 빈현내에서의 평가가 좋았던 탓에 그는 1979년 공청단 중앙 청년농업부 간부로 발령받고 베이징에 입성한다. 그는 이후 1994년까지 16년동안 공청단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다. 공청단에서도 주로 농업관련된 일을 했다. 이때 그는 공청단 1서기를 역임했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쑹더푸(宋德福, 사망), 리커창(李克强) 상무부총리를 비롯해 많은 공청단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때문에 그는 공청단파 정치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한창푸는 1990년 공청단 농업부장을 맡으면서 원자바오 총리와 가까워졌다. 원자바오 총리 역시 농업문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농업분야를 줄기차게 연구하던 한창푸의 재능을 귀하게 여겼다.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중앙서기처 서기를 겸임하고 있었던 원자바오는 1994년 한창푸를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부주임으로 끌어올린다. 영도소조에서 농업조 부조장을 맡겨 농업관련 직무를 계속하도록 했다. 당시 원자바오의 많은 발언들은 농업관련 발언들은 한창푸의 손을 거쳐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총리 지방출장 빠짐없이 동행
2001년 원자바오는 한창푸를 농업부 부부장으로 승진시켰으며, 2003년에는 국무원연구실 부주임으로 이동시켜 자신의 곁에 두었다. 한창푸는 2005년 홍콩의 문회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농업문제를 극히 중요시하는 원자바오 총리는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은 지방을 다녀본 지도자일 것”이라면서 “나는 그의 지방출장을 거의 모두 동행했다”고 밝혔다. 그는 “원 총리가 농촌을 들릴때면 거의 매번 민가에서 자고 함께 농민들과 밥을 함께 먹고 저녁이면 농민들을 불러모아 농촌의 사정을 듣고 의견을 나누곤 했다”며 “원총리를 따라 중국 전역의 현과 시 중 나는 절반 이상을 다녀봤다. 어떤 성은 60~70%의 지방을 모두 다녀봤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2006년 지방경력이 약한 한창푸를 지린성 부성장으로 발령을 내 커리어상 약점을 보완하게 했다. 한창푸는 중국 북부지역 최대의 농업지역인 지린성에서 농정실무를 더욱 가다듬었다. 이후 2009년말 원자바오는 농업부장이던 쑨정차이(孫政才)를 지린성 서기로 이동시켰고, 지린성장이던 한창푸를 2009년 12월 다시금 농업부장으로 불러들였다.
◆원총리의 '후이궈 장관’
한창푸가 농업부장에 오를 당시 중국 언론들은 한창푸를 후이궈(回鍋) 장관 중 한명이라고 소개했다. 후이궈장관이란 중앙부처에서 근무하다가 3년에서 4년가량을 지방에서 근무한 후 승진해서 다시 중앙으로 돌아온 관료를 지칭한다.
한창푸 부장과 같은 후이궈장관으로는 천레이(陳雷) 수리부장, 샤오제(肖捷) 국가세무총국 국장, 양환닝(楊煥寧) 공안부 상무부부장, 선더융(沈德詠) 최고인민법원 상무부원장 등이 꼽힌다.
천레이는 2001년 수리부 부부장에 올랐으며 이후 2005년 신장(新疆)자치구 부주석으로 옮겼다가2007년에 수리부장으로 베이징에 복귀했다. 샤오제 국장은 2001년 재정부 부부장에 오른 후 2005년 후난(湖南)성 부성장으로 이동했고 2007년에 국가세무총국 국장으로 승진했다. 양환닝 공안부 상무부부장 역시 2001년 공안부 부부장에 올랐다가 2005년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정법위 서기로 근무했다. 이후 2008년 공안부 상무부부장으로 베이징에 돌아왔다. 선더융은 1998년 최고인민법원 부원장이었고, 2006년 상하이 기율위원회 서기로 이동했다가 2008년 최고인민법원 상무부원장에 올랐다.
이들은 모두 오랜기간 중앙에서 근무했으며 지방정부 경력을 쌓은 후 더욱 중요한 직책을 부여받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모두들 1950년대생으로 학력이 높다. 천레이는 석사출신이며 한창푸, 샤오제, 양환닝, 선더융은 박사출신이다. 특히 이들은 모두 원자바오 총리 계열로 꼽히는 관료들이다.
◆농민공 문제에도 뚜렷한 의견
한창푸는 학자형 관료다. 그는 중앙정법대학에서 경제법 석사를, 칭화(靑華)대학 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한창푸는 2003년 ‘현대화 과정 중의 3농문제’라는 저서를 발표했다. 학계는 물론 관가에서도 그의 분석과 주장에 주목했다. 이어 2006년에는 ‘중국 농민공의 발전과 종결’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인민일보, 경제일보, 실사구시, 농업경제문제 등 여러 매체에 지속적으로 농업관련 학술논문을 발표해 농정에 있어서 그의 이론적 토대가 굳건함을 과시했다.
그는 농민공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한 자신만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한창푸는 지난 2월 인민일보의 인터넷 사이트인 ‘인민망에 ”’90後‘ 농민공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눈길을 끌었었다.
한 부장은 우선 “현재 중국의 농민공 수는 2억명에 달한다”며 1980년대 농촌에서 도시의 일용직으로 흘러온 인력을 제1세대 농민공, 1980년대와 1990년대 경제성장시기에 돈을 벌기 위해 농촌을 이탈해 도시로 온 인력을 제2세대로 분류했다. 그는 “1세대와 2세대 농민공들과 달리 3세대인 ’지우링허우(1990년대 이후 출생자)‘ 농민공은 대략 4000만명으로 추산되며 농촌에 대한 애정이 없고 도시를 동경하는 만큼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을 선호하고 부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이들은 휴대전화와 인터넷 등에 익숙해 언제든지 집단화, 정치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때문에 한부장은 “정책적으로 각별히 배려해야 한다”며 대안으로 포화상태인 대도시가 아닌 인력난을 겪는 중소도시의 호적을 가진 인력으로 키워내자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