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당서기는 이달초 크레그 영국 부수상과 런던에서 회담을 갖고 중영 양국간 밀접한 교류와 우호 협력을 강화해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2007년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앞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차기지도자 자격으로 위정성(兪正聲)과 리커창(李克强)을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선임할 것을 염두에 뒀다고 한다.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인 리커창을 차기 국가주석으로 만들 의도였던 후 주석은 중국 정치계 원로들과의 관계가 돈독하면서도 나이가 많아 국가주석직에 오를 수 없는 위정성을 리커창과 함께 내세웠다. 위정성 카드는 장쩌민(江澤民), 쩡칭홍(曾慶紅) 등 원로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리커창을 자연스레 주석으로 올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시진핑(習近平)이 2007년 봄 유력한 차기후보로 급부상했고, 원로들이 적극적으로 시진핑을 지원하면서 17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리커창과 함께 상임위원에 진입했다. 그리고 위정성의 상임위원 진출은 좌절됐다. 대신 위정성은 시진핑의 후임자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한 곳인 상하이 서기에 임명된다.
2007년 10월에 열린 제17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된 사람은 모두 1940년 1월1일 이후 출생자였다. 위정성으로서는 내년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임위원에 올라설지, 아니면 정치국위원으로 은퇴를 해야할지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많은 정치분석가들은 위정성이 무난하게 상임위원에 진출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강점은 화려한 가문과 그로 인한 방대한 네트워크다. 위정성만큼 화려한 가문을 자랑하는 정치인은 현재 중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문혁시절, 강청의 잔혹한 핍박
태자당인 위정성은 1945년 4월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시에서 태어났다. 공산당 고급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베이징 81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어머니 판진(範瑾)이 간부자녀들의 악습을 배우고 민중과 분리되는 것을 우려해 보통 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그는 이후 공산당 고급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베이징 제4중학교(고등학교) 졸업한 후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에 진학했다.
위정성의 아버지인 황징(黃敬, 본명 유치웨이, 俞啟威)는 마오쩌둥의 네번째 부인인 장칭(江靑)과 젊은 시절 동거하던 사이였다. 장칭은 위정성이 판진과 결혼 한 후에도 위정성에게 포커를 치자고 초대하는 등 교류를 이어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황징은 번번이 거절했다. 황징은 1958년 4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장칭은 1966년 문혁이 시작되자 황징의 부인을 비롯한 위정성의 가족을 참혹하게 몰아붙였다. 장칭은 당시 베이징시 부시장이던 판진을 주자파로 몰아 가혹한 대우를 한다. 장칭은 판진을 감옥 독방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게 했다. 판진이 출옥할 때 그녀는 언어능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회복할 수 있었다.
위정성의 여동생인 위후이성(兪惠聲)은 온갖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려 자살했다. 위후이성은 베이징여일중(北京女一中)에 다니는 학생이었고, 시험을 보면 항상 1등을 독차지했던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공사판에서 굶어죽었다.
위정성 일가는 문화대혁명 때 직계와 방계가족 9명이 사망했을 정도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68년 위정성은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을 졸업한 위정성은 하방되어 허베이(河北)성 장자커우(張家口)시의 무선전신 6공장 기술자로 근무한다. 위정성은 이 곳에서 7년을 근무한 후에야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칭다오에서 한국기업진출 덕을 보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위정성은 1975년부터 제4기계공업부에서 근무한다. 당시 공업부장이던 장쩌민 전 주석의 후원을 받아 그는 1984년에는 전자공업부 전자기술추인응용센터의 부소장까지 올라갔다.
1984년부터 2년동안 장애인 복지기금을 운영하는 캉화(康華)공사 사장 및 부이사장으로 활동한다. 캉화공사는 덩샤오핑의 장남인 덩푸팡(鄧樸方)이 관여하는 기금이며, 위정성은 덩푸팡과 막역한 사이다. 그의 큰형 위창성(兪强聲)이 1985년 국가안전부 간부의 신분으로 미국에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캉화공사를 나와서 지방관리의 길을 걷게 된다.
위정성은 1985년 산둥(山東)성 옌타이(煙台)시 부시장, 1987년 옌타이시 시장을 역임한 뒤 1988년 같은 성의 칭다오(靑島)시 부시장으로 전임했다가 93년에는 칭다오시의 시장이 되었다. 칭다오에서 대외개방을 적극 추진하면서도 대담한 주택제도 개혁을 실시해 주택보급률을 높였다.
칭다오시장 당시 다른 지방관료들은 벤츠를 타는데 그는 시장전용 승용차를 중국 국산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시의 수입내역과 시장 자격으로 받은 선물내역과 처리결과를 모두 TV에 공개하는 모습도 보였다.
◆중앙과 지방에서의 고른 경력
그는 국무원 건설부 부부장에 임명된 뒤 1998년 주룽지(朱鎔基) 내각이 출범하면서 부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53세로 29명의 부장 중 두 번째로 나이가 어렸다.
중국의 건설부장이 된 이후 중국의 사회간접자본 건설 사업에 한국을 참여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1998년 11월 중국을 방문한 이정무(李廷武)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과 2억달러 규모의 양쯔(揚子)강 교량과 광동 고속도로, 4억달러 짜리 하이난(海南)대교, 14억5,000만 달러 상당의 창저우 화력발전소 등 6개프로젝트 외에 하얼빈 발전소 확장공사, 베이징~상하이 고속도로, 홍콩 서부철도 등의 사업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한 것이 그 대표적 예.
2001년 위정성은 후베이(湖北)성 서기로 임명된다. 이후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직에 오른 2002년 그는 정치국위원에 진입해 핵심 중앙지도자 반열에 오른다.
가난한 지방이었던 후베이에서 그는 농촌개혁을 추진했다. 지방의 간부들을 교차임명했고 내부기구들을 합병시켜 공무원 수를 줄였다. 또한 비자금을 적발해 일벌백계했으며 특권차량을 취소시켜 농민들의 부담을 줄였다.
위정성 상하이시 당서기가 지난해 상하이 엑스포를 성공리에 마친 뒤 상하이 둥화(東華)대학의 장신(張鑫) 학생 등 자원봉사자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다. |
◆상하이에서 “시진핑을 본받자”
2007년 위정성은 상하이 서기로 자리를 옮긴다. 인수인계대회에서 위정성은 두번에 걸쳐 ‘시진핑을 배우자’고 소리높여 외쳤다. 그는 “시진핑 동지가 상하이의 경제발전을 위해 내놓은 중요한 생각을 우리는 계속해서 견지해 나가야 하며, 진지하게 배워야 합니다”고 말해 그보다 8살이나 적은 시진핑을 태자당의 맹주로 받아들이는 정치적 기민함을 보인 것.
이밖에도 위정성은 상하이에서 여러가지 업적을 남겼다. 우선 그는 2020년까지 상하이를 국제금융센터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충실히 실행했다. 2009년 4월 20일 상하이 교통대학 상해 고급금융학원은 정식으로 설립시켰으며, 6년 동안 3억2000만 위안을 투자해 상하이 고급금융학원 건설에 지원하기로 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면서도 “상하이(上海)가 국제 금융중심지로서 홍콩을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상하이와 홍콩은 항상 형제도시로 남을 것입”이라며 홍콩에서의 걱정을 안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