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재앙의 후폭풍이 장기화하면서 피해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지진으로 파괴된 기반시설을 복구하고, 사고 원전에서 흘러나온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는 데 20조 엔(약 255조원)이 들 것으로 추산하고 특별예산 편성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이 엄청난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일본 경제는 지진 사태 이전에도 디플레이션과 수요저하, 천문학적인 국가부채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BOJ) 총재(사진)로서는 가시방석이 아닐 수 없다.
미국 경제 전문지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11일자 최신호에서 일본 내에서 재건자금 마련과 관련해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집중 조명했다.
논란의 핵심은 재건비용 조달을 위해 일본 정부가 발행하게 될 국채를 어떻게 소화하느냐다. 집권 민주당의 가네코 요이치를 비롯한 여야 의원들은 BOJ가 이를 직접 사들여야 한다며 시라카와 총재를 압박하고 있다.
가네코 의원 등은 1930년대 초 다카하시 고레키요 당시 재무상이 국채를 대거 매입한 것이 일본 경제가 대공황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한다. 일본경제연구센터(JCER)에 따르면 다카하시는 1932회계연도에 국채 발행액을 두 배 늘려 재정지출 규모를 32% 확대했다.
그러나 국채 발행을 통해 늘어난 예산 상당액은 군비로 지출됐고, 아이러니하게도 다카하시는 1936년 군사쿠테타 과정에서 처형됐다. 긴축정책을 동원해 인플레이션을 막느라 한창 고생한 뒤다.
시라카와 총재가 의회의 국채 매입 요구에 저항하고 있는 것도 인플레 우려 때문이다. 돈을 찍어내 국가 채무를 화폐화(monetization)하는 것은 무차별적인 화폐발행으로 이어져 심각한 인플레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국채금리의 급격한 인상을 초래하지 않고도 일본 채권시장이 충분히 신규 발행 국채를 소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본 의회는 증세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시라카와 총재를 계속 몰아세우고 있다.
신선식품을 제외한 일본 소비자물가는 지난 2월까지 24개월 연속 하락했다. 또 2010회계연도 4분기(2011년 1~3월)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연율로 1.3% 위축됐는데 모건스탠리MUFG증권은 2011회계연도 1분기 일본의 GDP는 무려 12% 감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울러 일본 정부의 미상환 부채는 GDP의 200%에 이르는 상황이다.
자민당의 야마모토 코조 의원은 최근 인터뷰에서 “일본 경제가 디플레에 빠진 상황에서 세입을 느릴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시라카와도 할 말은 있다. 지난달 11일 대지진 발생 3일 만에 금융시장에 15조 엔을 쏟아부은 데 이어 기존의 채권 매입 프로그램 규모를 10조 엔 확대한 것. 채권 매입 대상에는 물론 일본 국채도 포함된다. BOJ는 다만 직접 매입보다는 유통시장을 통한 간접 매입 방식을 쓰고 있다.
사라카와는 지난해 11월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이 부채를 화폐화하는 것으로 비쳐진다면 국채금리가 올라 인플레 기대감을 높일 것”이라며 BOJ가 국채를 간접 매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비즈니스위크는 국채 매입 논쟁이 일단락돼도 정치권은 시라카와 BOJ에 대한 비난 수위를 낮추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 경제가 20년 전부터 디플레이션과 경기침체 등으로 고전하고 있는 탓이다.
지난해 가을 반(反)디플레 전선을 구축한 150여명의 민주당 의원들은 BOJ에 물가하락을 막고, 고용창출력을 높일 수 있는 인플레 목표제를 도입하라고 촉구했다. 인플레 목표제가 도입되면 BOJ의 독립성은 크게 약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