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예”
“남한 사람이지요?”
“예. 그런데 지금은 베이징에서 살고 있어요”
“아. 그러면 ‘신(新) 조선족’이네요?”
“아녜요, 농담이예요. 저도 베이징에서 4년간 일한적이 있죠. 우리 부모님도 돈벌러 한국에 갔어요 ”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지난 2008년 7월 말 용정 일송정. 이번 옌벤 방문은 옌벤조선족 자치구의 조선족 박물관을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옌벤에 오면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무심코 발길이 끌려 일송정을 찾았다. 저아래 해란강은 바짝 마른 실개천이 되어 흐르며 말없이 격동의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 낮의 뙤약볕 더위 탓인지 일송정 주변에는 사람 그림자도 구경하기 힘들었다. 덥든 춥든 일송정에 오르면 언제나 마음은 편하다. 고향 뒷동산을 닮은 산세와 한국형 정자, 소나무, 개금나무 하나하나가 모두 정겹게 느껴진다. 옌벤에 올때마다 이곳으로 자꾸 발길이 끌리는 이유다.
오솔길을 10분쯤 걸었을까, 일송정 정자 그늘아래서 숯불에 가리비를 구워 맥주를 마시던 소풍객들중 한명이 말을 붙여왔다.
“더운데 어서 앉아요. 맥주 한잔 드시고 땀 좀 식히세요”
“고맙습니다”
숫불 화로석쇠에는 싱싱한 가리비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고, 한 켠에는 물 수증기가 줄줄 흘러내리는 냉동 병맥주가 두짝이나 쌓여있다. 네명의 남녀는 피서를 나온 용정 동포 처녀 총각들이었다.
아까 얘기한 '신 조선족'이라는 농담은 요즘 중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뜻하는 것이라고 그들가운데 한명이 설명했다.
이들의 호의 덕에 정자 그늘속에서 싱싱한 가리비 안주에 시원한 맥주를 몇잔 들이켜고 헤란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상쾌하고 뼛속까지 시원해졌다.
지난 1992년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후 나는 늘 고향을 찾는 기분으로 옌벤에 들렀다. 그곳엔 한국에 없는 먼 옛날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토속 정서가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나는 이날 남에게 선뜻 젖가락을 내미는 따뜻한 인심, 작은 인연의 끈이라도 챙기려는 속성에서 진한 동포의 정을 느꼈다.
일송정 산길을 걸어나와 주차장이 있는 공터로 나오니 한 잡화상이 섭씨 33도의 땡볕속에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취급 품목은 주로 조선족 동포 사회의 유관 책자들과 CD, 이런 저런 잡동사니들이었다. 윤동주 시집 한 권과 항일투쟁에 관한 CD 한 장을 사서 배낭속에 챙겨 넣었다.
용정 중학과 명동의 윤동주 생가로 향하는 차안에서 방금 구입한 윤동주 시집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옌벤조선출판사라는 곳에서 펴낸 이 책에는‘우리나라 사람’으로 여겼던 윤동주 시인이 ‘조선족 중국인 ’으로 적혀 있었다. 혼란기에 옌벤에서 나서 생활했기에 온전한 우리 국적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막상 저자 소개난의 ‘윤동주는 중국인’이라는 문구를 대하니 기분이 아주 묘했다.
한 여름 뙈약볕의 ‘윤동주 순례’는 용정 중학과 윤동주 생가로 이어졌다. 하지만 머리속은 온통 ‘조선족 중국인 윤동주’ 에 관한 어지러운 상념으로 가득 찼다.
‘조선족 중국인 윤동주’와 중국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숱한 ‘조선족 동포 중국인’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왜 중국속의 한국인들은 조선족 중국인들과 불화와 반목으로 날을 지샐까. 일송정에서 만난 선하고 순박한 ‘조선족 중국인’ 젊은이들의 모습이 자꾸만 조선족 중국인 윤동주에 오버랩되면서 혼란스러움이 더해졌다.
(아주경제 최헌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