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의 트렌드 브리핑] 위험한 대북관

2010-11-2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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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가을학기가 막 시작된 대학 캠퍼스는 나무 잎사귀들이 제가끔 뿜어내는 선홍빛 색채로 반짝였다. 하늘 높이 떠 있는 햇살은 정겨웠고, 가을 공기는 차가웠지만 등굣길 학생들이 옷깃을 여미지는 않을 정도였다.

봄학기와 달리 가을학기 초는 데모철이 아니다. 캠퍼스는 모처럼 평화롭고 한가로운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데모의 총본부인 총학생회실도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여기저기 철지난 현수막이며 대자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모처럼 수업이나 들어가자!" "오랜만에 공부하면 머리에 쥐날걸?" 하하 낄낄, 농담과 웃음소리도 흐드러졌다. 몇몇 학생회 간부들이 막 사무실을 나설 때였다. 한 학생이 숨을 헐떡거리며 허겁지겁 들이닥쳤다.

"형들! 이...이거 보세요. 이거...."

치열한 데모 현장에 익숙해져 최루탄이 코앞에서 터져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는 간부들이다. 심드렁한 눈길로 쳐다보는데, 그 학생이 유인물 한 장을 흔들어 댔다. 1985년 겨울 방학 시즌부터 솔솔 냄새를 풍겨온 소위 주사파 계열의 유인물이었다. 사무실로 몽땅 가져와 찬찬히 읽어보니 내용이 가관이었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요지는 이렇다.

'싸움의 주적은 허수아비 독재정권이 아니라 배후인 미제다. 미제의 압제에 신음하는 애국 민중 전부가 투쟁에 떨쳐나서야 한다. 애국 민중은 노동자 농민만이 아니다. 도시서민, 학생, 재야 지식인, 정치인 등 전부를 망라한다. 애국 민중이 모두 나설 수 있는 대중적인 투쟁 노선으로 전환해야 한다. 강령적인 구호는 '반전반핵 양키고홈'이 되어야 한다.'

1986년 1학기말 서울대에서 있었던 총학생회장 보궐선거. 바로 그때 당선되었던 김모라는 후보가 내세웠던 구호였다.

유인물은 서울 전역의 대학교에 일제히 뿌려진 듯 싶었다. 모두 황망히 유인물을 불태우며 허구적 관념론과 교언영색으로 가득 찬 주사파 노선에 의해 되레 주체성을 상실하게 될 학생운동의 앞날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연탄가스처럼 번진 주사파의 독기가 학생운동권을 그리 순식간에 장악할 줄 예상하지는 못했다.

주사파는 주도면밀하게 데모 전선 100m 밖에 서서 양심에 찔려하는 소심한 학생들을 운동의 주체로 추켜세웠다. 그저 마음으로 성원만 해도 애국대중이자 양심적인 지식인의 반열에 올렸다. 데모는 치열한 공방전이 아니라 신나는 음악에 맞춘 집단 체조로 변질됐고 위험하지 않은 데모판은 곱상한 여대생이 치마를 입은 채로도 참여하는 놀이판이 되었다.

결국 몇년 안 가서 학생운동권은 누구나 쉽게 운동가임을 표방할 수 있는 애국 민중노선, 즉 주사파 노선의 추종자들로 뒤덮였다. 이른바 북한이 혁명의 중심기지이자 주체가 되고 남한 민중들은 혼란을 조성하는 꼭두각시 제2중대가 되는 통일전선전술이 관철된 것이다.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핵무기 협박,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에 이어 연평도 폭격이 잇따르고 있는 와중에 남한 사회 내부의 희미하고 엉성한 대북관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만행을 규탄하는 대신 '오죽하면 그러겠나' 동정하는 심리가 퍼지고 '도발을 응징하자' 대신 '그러다 전쟁 날라' 민심을 교란시키는 헛소문이 나돈다. '북한을 동정하고 정부를 비난하는 게 요즘 젊은이들의 개성이자 라이프스타일이자 문화’라고 떠벌이며 '그게 뭐 어때서?'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25년 전 연탄가스처럼 번진 대남공작의 악취에 중독된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앨빈 토플러에 따르면 21세기 전쟁의 트렌드는 용병전, 사이버전과 함께 심리전이 포함된다. 우리 군이 물리적 응전만이 아니라 점점 뜨물처럼 흐려지는 대북관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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