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양궁이 24일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전 종목을 석권할 수 있었던 데는 이창환(28.두산중공업)의 숨은 도움도 컸다.
이창환은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남자 대표팀의 베테랑 가운데 하나이지만 단체전과 개인전 본선을 전혀 뛰지 못했다.
광저우로 출국하기 전에 혈압이 올라 컨디션 난조를 겪었고 그 때문에 뒤늦게 현지에 도착해 단체전 조합에서 빠졌다.
개인전 본선에 출전할 64강을 가리는 예선에서도 김우진(18.충북체고), 오진혁(29.농수산홈쇼핑), 임동현(24.청주시청)에 이어 4위에 올랐지만 탈락했다.
아시안게임에서 한 국가에 2명까지만 토너먼트에 진출한다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규정 때문이었다.
단체전과 개인전 본선에 나가지 못하게 된 이창환은 서운한 기색도 없이 바로 특급 도우미로 변신했다.
남녀 출전자들이 훈련할 때면 망원경을 눈에서 떼지 않고 점수를 확인해주는 허드렛일을 맡았고 경기에서는 동료의 화살을 과녁에서 뽑고 공정한 채점이 이뤄지도록 감시하는 타깃 에이전트로 활약했다.
그뿐만 아니라 경험이 많은 국내 최고의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서 이번 대회가 첫 메이저대회인 막내 김우진에게 따뜻한 조언자 역할도 했다.
이창환은 "결국은 내가 빠진 자리에 김우진이 들어간 것인데 우진이가 잘할 수 있도록 얘기를 많이 해주려고 했다"며 "우진이가 단체전을 잘하고 개인전도 잘해서 많이 기쁘다"고 말했다.
김우진이 2관왕에 오르면서 한국의 금메달 싹쓸이가 확정된 현장에도 이창환은 타깃 에이전트로서 과녁 뒤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이날 김우진과 타룬디프 라이(인도)의 결승전에서 분위기가 김우진 쪽으로 확 쏠리도록 라이에게 치명타를 날린 것은 이창환의 주먹이었다.
전광판에 나타난 4세트 점수는 27-27로 동점.
하지만 채점을 확인하며 화살을 뽑던 이창환은 70m 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김우진 쪽으로 돌아서 입이 귀에 걸린 채 허공에 주먹을 흔들었다. 첫발 9점이 10점으로 수정돼 세트를 따냈다는 신호.
전광판에 수정된 점수가 표시되기도 전에 이창환의 주먹을 본 한국 응원단의 함성은 높아졌고 김우진도 안도감에 평정을 되찾았다. 라이는 정반대로 주눅이 들면서 마지막 세트와 금메달을 김우진에게 내줬다.
베테랑 이창환은 단체전에서는 우승 경력이 많지만 작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개인전 토너먼트에서 매번 탈락하고 타깃 에이전트를 전담하다시피한 특이한 선수다.
남몰래 많이 울다가 작년에야 개인전 물꼬가 터졌던 만큼 이번 대회 개인전에 대한 미련이 많을 법도 했지만 김우진의 2관왕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아쉬움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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