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승부차기에서 6번째 키커로 나선 장슬기가 찬 공이 그대로 골망을 가르며 우승이 확정되자 TV중계를 지켜보던 시민의 함성이 창을 뚫고 새어 나왔다.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날아온 대표팀의 우승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한 세 남자가 있었다.
조광래 남자축구대표팀 감독과 허정무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최인철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이다.
이른 아침부터 태극 소녀들의 경기를 보느라 아침 식사도 못 했다는 조광래 감독은 "자랑스럽다, 아니 사랑스럽다"는 말로 감격을 전했다.
조 감독은 "일본의 기술력에 조금 밀려 보이긴 했지만 불굴의 투쟁력으로 역전에 또 역전을 해냈다. 월드컵 결승전처럼 큰 대회에서 그렇게 따라잡기는 불가능하다"며 어린 여자 선수들의 정신력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우리 남자 선수들이 본받아야 한다. 요새 프로에서 뛰는 젊은 선수들에겐 그런 투지도, 용기도 없다"며 쓴소리도 곁들였다.
사상 처음으로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에서 우승을, 그것도 어린 여자선수들이 해낸 건 다분히 여자축구 지도자들의 공(功)에 있다고 조 감독은 강조했다.
조 감독은 "경남 구단을 맡을 때 여민지가 다니는 함안 대산고 앞을 많이 지나다녔다. 새벽부터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감탄할 지경이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지도자들이 운동장에서 함께 뛰며 가르치는 걸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며 "이렇게 이른 시일에 여자축구가 세계 정상급에 올라선 건 선수들을 길러낸 전국 각지의 지도자들 덕택이다.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 감독은 최덕주 감독이 선수 시절 '영리한 미드필더'였다고 전하며 "지도자로서 성공할 것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정말 고생 많았을 것"이라고 축하의 메시지를 건넸다.
허정무 전 남자대표팀 감독 역시 들뜬 마음으로 TV를 통해 우승의 감격을 함께했다.
"정말 축하할 일입니다. 아무리 여자축구라고 해도 큰일을 해낸 겁니다"라고 말문을 연 허정무 감독은 여자축구가 17세, 20세에서 강세를 보이는 만큼 앞으로 성인 여자축구도 큰 결실을 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허 감독은 일본에 역전승한 원동력이 대표팀의 강한 체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체력, 정신력과 함께 일본과 같은 수준 높은 패스워크나 기술을 잘 접목시킨다면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지난 8월 U-20 여자대표팀을 FIFA 월드컵 3위에 올려놓으며 38세 나이에 스타 명장의 반열에 오른 최인철 현 여자대표팀 감독의 심정은 어떨까.
최 감독은 '동생 태극소녀'들이 이뤄낸 월드컵 우승이 "상당히 기쁘다"면서도 이어 다소 진중한 목소리로 결승전 경기 분석과 함께 여자축구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견해도 곁들였다.
최 감독은 마치 트리니다드 토바고 현지에서 경기를 지켜본 것 마냥 생생하게 결승전을 차분히 복기했다.
"경기력은 밀렸지만 정신력과 투지가 일본보다 훨씬 위에 있었어요. 일본은 원래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위축되거든요. 결승전 승부처는 전반 종료 직전 아름이가 터뜨린 동점골이었어요. 2-1로 지는 상황에서 후반에 들어갔다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최 감독은 U-20 언니들에 이어 U-17 동생들까지 큰 성과를 거둬 자신이 맡게 된 성인 대표팀 역시 세계무대에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엔 성인 여자 대표팀을 이끌고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나가는 최인철 감독에게 이날 태극 소녀들의 낭보는 '자극제'이자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최 감독은 U-20 여자월드컵 때에도 그랬지만, 이번 U-17 여자월드컵 우승 역시 국민에게 잠깐의 즐거움이자 이벤트로 그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장은 국민이 여자축구에 열기를 보이겠지만 지속적이지 않다는 생리를 잘 아는 최 감독다운 견해였다.
최 감독은 여자축구가 꾸준히 성장하려면 제도적인 뒷받침 못지않게 여자축구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축구를 하고 싶어도 여자아이라고 부모님이 반대해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나라 여자축구가 세계무대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려면 여자축구에 대한 사회 분위기부터 변해야 해요"
이날 U-17 여자축구대표팀의 월드컵 우승이라는 큰 경사를 맞아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지도자 3인은 저마다 감격의 색(色)을 달리했지만, 모두 여자축구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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