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13·1] ‘독립선언’ 현대차의 홀로서기

2010-09-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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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정몽구 회장이 ‘자동차 독립선언’을 할 당시 현대차는 해외에서는 그저 그런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였다. 포니에 이어 쏘나타가 성공할 때도 그저 싼 중소형차 브랜드에 불과했다.

기아차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 ‘KIA’란 해외 브랜드 명은 전사자를 뜻하는 ‘Kill In Action’의 약자로 오해받기 일쑤였다.

당시 현대차 쏘나타가 10년 후 자동차 종주국인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인 컨슈머리포트의 표지모델을 장식하게 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사(枯死) 직전이었던 기아차가 K시리즈로 디자인의 아이콘이 되고,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200만대를 판매하는 브랜드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한 전문가도 전무했다.

하지만 이는 10년 만에 현실이 됐다. 넘을 수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도요타자동차의 벽은 어느새 눈 앞으로 다가왔다. 평생 자동차만 바라본 정몽구 회장과 ‘신(新) 현대맨’ 덕분이었다.

   
 
현대차 울산공장을 방문한 정몽구 회장 모습. 정 회장은 지난 6월 압둘라 귤 터키 대통령 방문에 맞춰 2년 3개월 만에 울산공장을 방문했다. 바로 옆은 윤여철 현대차 부회장 모습.

◆“자동차는 지킨다”… MK 독립선언=
2000년 5월 31일, 정몽구 회장은 처음으로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을 거슬렀다.

그는 앞선 1992년 정 명예회장의 대선 출마 때도 반대의 뜻을 내비친 바 있지만 결국 선거 운동에 앞장섰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오해가 겹친 탓도 있지만 이날이 사실상 첫 ‘항명’인 셈이었다.

이날 정 명예회장이 자신을 비롯 그룹 경영권을 놓고 다투던 아들 몽구.몽헌이 경영에서 손을 뗀다는 이른바 ‘3부자 동시 퇴진’을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이를 거부했다. 정 회장은 이날 저녁 “자동차 사업에 전념할 뜻을 분명히 밝힌다”며 퇴진을 거부했다.

이로써 정 회장은 그룹 회장 취임(1996년), 기아차 인수(1998년)로 자동차 대권을 잡은 데 이어 아버지 ‘왕회장’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독자경영’을 시작한다.

이는 고(故) 정몽헌 회장과의 경영권 다툼, 이른바 ‘왕자의 난’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정몽구 회장은 ‘3부자 동반퇴진’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동생 정몽헌 회장 측의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지금까지도 이날 정주영 회장의 선언이 정몽헌 회장 측의 ‘친위 쿠데타’로 보는 시각이 지금까지도 적지 않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 ‘왕회장’의 선언에도 그의 뜻은 변함이 없었다. 효심이 깊기로 유명한 정 회장이지만 자동차를 향한 그의 애정은 이를 뛰어 넘은 것이다.

정몽구 회장은 이로써 1960년대 짧은 미국 유학 시절 자동차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처음 자동차를 접한 이래 30여 년 만에 자신이 직접 자동차 사업의 큰 틀을 짤 수 있게 됐다.

경험은 충분했다. 그는 이미 현대정공 시절 갤로퍼와 그 후속 모델인 싼타모를 개발·출시하고 1996년부터 4년여 동안 자동차 사업을 총괄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기아차 인수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

정 회장은 같은 해 9월 현대차, 기아차,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현대강관(현 현대하이스코) 등 자동차 관련 10개 계열사를 이끌고 동생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국내 첫 자동차전문 그룹의 탄생이었다.

   
 
지난 2월 기아차 미국 조지아 공장을 방문한 정몽구 회장이 현지 엔지니어와 악수하는 모습. 이 공장은 올 초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그룹서 분리… 국내 첫 자동차전문 그룹 탄생=
현대자동차그룹은 같은 해 11월 현대정공을 현대모비스로 사명 변경했다. 12월에는 본사를 현재의 서울 양재동 사옥으로 이전, 본격 행보에 나선다.

그 해 현대.기아차는 글로벌 270만대 판매, 매출 30조원으로 전년대비 30%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2001년 1월 시무식에서 “우리는 아직 작은 성공에 도취돼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고 강조했다. 특유의 어눌한 말투였지만 단호함과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당시 정몽구 회장은 63세.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더 높은 품질의 자동차를 만들려는 그의 의지는 이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정 회장은 2001년 곧바로 세계 자동차 산업의 메카인 미국 공장 건립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같은 해 7월, 미국사업 총괄 사장에 오른 김동진 전 현대차 부회장(현 씨엔에스테크놀로지 회장)은 공장 건설 추진 TF 팀을 꾸리고 앨라배마 등 후보지를 물색했다.

그 이듬해인 2002년 4월, 1억2800만 달러의 지원금과 20년 법인세, 10년 재산세 면제 조건을 내건 앨라배마 지역에 부지가 확정되자 현대차는 곧 공장 착공에 들어갔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은 지난 2005년 준공 이후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 자리잡기까지 ‘뿌리’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올 초 미국 시장에 투입된 쏘나타도 이 곳에서 생산되고 있다.

중국 사업도 그룹 독립 이후 곧바로 추진됐다. 2000년 11월 중국 베이징에 중국총괄본부를 설립하고 2002년 12월부터 EF쏘나타 생산에 돌입했다.

그해 2월 베이징자동차와 현재의 ‘베이징현대’ 설립과 관련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지 불과 10개월 만이었다.

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도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독립한 이후의 ‘작품’이다. 2000년 당시 현대차 터키 공장 하나만으로는 유럽 시장에 한계를 느낀 정 회장은 동유럽에 또 하나의 공장 건립을 시사했다.

대우차 폴란드 공장 인수 등 여러 방안을 모색한 끝에 이 유럽 진출 프로젝트는 2004년 3월 슬로바키아 공장 신설로 결정 내리고 곧바로 착공에 들어갔다.

이로써 2001년 본격적인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출범 이후 3년 내에 전 세계를 아우르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마무리지었다. 이 같은 투자는 현대.기아차가 현재의 ‘글로벌 톱5’에 올라서는 디딤돌 역할을 한다.

(아주경제 김형욱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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