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BP는 브랜드만 바꾼 게 아니었다. 녹색과 노란색을 강조한 햇살 모양의 새 로고도 선보였다. '친환경 기업'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 때 내세운 슬로건도 '석유를 넘어서(BP·Beyond Petroleum)'였다.
10년만에 공든 탑이 무너졌지만 BP는 한동안 '개명'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2000년 4%에 불과했던 브랜드 인지도가 2007년 67%로 급등한 것이다.
최근에도 BP처럼 브랜드를 바꾸려고 고민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특히 간결해서 기억하기 쉬운 '머릿글자'를 활용한 브랜드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 전국공영라디오방송(National Public Radio)은 최근 'NPR'로 팻말을 바꿔 달았고 미국 비영리 청년단체 기독교청년회(YMCA)는 기존 약칭을 'The Y'로 줄였다. 이들은 새 브랜드가 기존 브랜드보다 조직의 진정성을 더 잘 대변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영저널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최근 약칭을 이용한 브랜드 개명의 득과 실을 따져봤다.
워싱턴포스트(WP)는 NPR이라는 브랜드는 일개 라디오방송국이 아닌 종합 미디어그룹을 연상시키는 성공작이라고 평가했다. 가디언 역시 'The Y'가 오랜 전통을 가진 YMCA에 새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극찬했다.
반면 HBR은 NPR이나 YMCA처럼 유서 깊은 조직이 브랜드를 바꾸는 경우에는 치러야 할 비용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길들여진 이름에 깃든 조직의 역사나 전통, 의미 등이 희미해지는 것은 물론 BP처럼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경우 영문 약자로 된 브랜드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멕시코만 사태 이후 피해지역 주민들은 BP를 '쇠똥(Bull Poop)' 혹은 '빌어먹을 가난뱅이(Bloody Poor)'라고 부르며 분을 삭히고 있다.
물론 영문 약칭을 이용한 브랜드가 역효과만 내는 것은 아니다. HBR은 '3M'을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았다. 1902년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설립된 미네소타마이닝앤드매뉴팩추어링컴퍼니(Minnesota Mining and Manufacturing Company)는 1950년대 브랜드를 3M으로 바꿔달고 연매출 600억달러의 혁신기업으로 성장했다.
HBR은 3M이 과감하게 지역색을 떨쳐내고 지루할 정도로 길었던 브랜드를 짧게 압축한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
'AARP'를 새 브랜드로 내세운 미국은퇴자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Retired Persons)는 압축 효과는 물론 '은퇴(retire)'라는 의미를 희석시킨 것이 뒷심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AARP라는 브랜드로 은퇴를 앞두고 회원 가입을 원하는 50대 직장인들의 거부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HBR은 이밖에 1990년 미국 켄터키주의 주명(州名) 사용세 부과 방침에 맞서 브랜드를 바꾼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 'KFC(Kentucky Fried Chicken)'와 'TFW(Tourism Federation of Wisconsin)'를 성공 사례로 제시했다.
위스콘신주관광협회(TFW)는 원래 이름이 'WTF(Wisconsin Tourism Federation)'였는데 'WTF'가 영어 비속어의 약자와 같아 애를 먹다 단어의 순서를 바꿔 문제를 해결했다.
HBR은 기존 브랜드를 영어 머릿글자로 바꾸기 전에 고민해봐야 할 것들도 조언했다.
우선 새 브랜드가 오랜기간에 걸쳐 어렵게 얻은 기존 브랜드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또 BP처럼 기존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된 경우에는 가능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좋다. 금융위기 속에 '공공의 적'으로 지목됐던 미국 보험사 AIG가 AIU로 거듭나려고 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또 하나 명심할 것은 고객들이 실제 부르고 있는 이름을 따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보통 긴 영문 브랜드를 약자로 줄여 부른다. 이 경우 브랜드를 아예 영문 약자로 바꾸면 마케팅에 드는 수고도 덜 수 있다.
HBR은 마지막으로 BP처럼 이름을 가지고 장난치기에는 영문자 2~3개가 가장 쉽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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