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7일 삼성이 새로운 도약을 선언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건희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꾸자"며 포문을 연 이후 삼성은 기존의 양 경영에서 질 경영으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1938년 대구에서 창립한 이후 지속적인 성공가도를 달려온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그간 쌓아온 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
1987년 삼성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가 6년간의 침묵을 깨고, 그룹의 체질 개선에 나선 것. 이건희는 그간 발전을 거듭해온 삼성에 대해 작심하고 쓴 소리를 했다. '말기암 환자', '영양실조', 당뇨병', '선천성 북구 기형'... 주요 계열사들에 대해 이건희는 원색적인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이병철이 회장에 있던 시절 한 발 물러서 있던 그였다. 회장 취임 이후에도 선친이 경영을 맡겼던 기존 비서실 인사들의 결정 권한을 존중했다.
하지만 1993년 이후 그는 무섭도록 빠르게 기존의 삼성과의 길별을 선언했다. 이병철 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건희의 삼성이 출항하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변혁의 단초는 일본인인 후쿠다 시게오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의 보고서에서 시작됐다. 일명 후쿠다 보고서라고 불리는 '경영과 디자인' 보고서는 삼성의 질병을 정확히 진단했다. 후쿠다는 1991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삼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의 지적은 수용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1993년 6월 5일 사표와 함게 이건희에게 56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보냈다.
아직까지 삼성 임직원들은 공업디자인.상품디자인에 대한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보고서는 주로 디자인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보고서를 통해 이건희는 삼성 내부에 오랜 기간 쌓였던 문제들을 간파할 수 있었다.
후쿠다 보고서와 세탁기 조립 영상을 접한 이건희의 행보는 빠르게 진행됐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이건희는 곧바로 200여 명의 회사 경영진을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했다. 그리고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던 그는 그해 7일 시작한 프랑크푸르트 회의를 24일까지 진행했다. 장기간에 걸친 회의는 대부분 새벽이 돼서야 끝났다. 그리고 회의의 대부분의 이건희의 질책과 새로운 비전 소개로 진행됐다. '경청'을 중요히 여겨왔던 그가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오랜 기간에 걸쳐 이야기 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단지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이건희는 곧바로 잘못된 부분에 대한 시정을 명령했다. 불량이 일어난 생산라인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생산중단 시키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한 것. 당시 삼성전자는 자체 브랜드 상품 외에도 주문자생산방식(OEM) 제품이 매출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불량 라인을 정지시키면 거래선과 약속한 납품일자를 지킬 수 없어 경영에 큰 타격이 예상됐다.
당시 비서실장인 이수빈(현 삼성생명 회장)이 "질과 양은 동전의 양면"이라며 질 경영에 '올인'하라는 이건희의 지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밝혔지만 이에 이건희는 회의 도중 티스푼을 던지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이건희의 최측근인 이수빈의 의견마저도 묵살당한 상황에서 나머지 경영진들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로써 삼성의 품질경영은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다.
1993년 3월 미국 로스앤젤러스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베를린-스위스-런던-도쿄로 이어지는 이건희의 해외 순방 회의는 5개월만인 8월에야 끝났다. 이 기간 동안 삼성 임직원 2000여 명이 해외로 불려나가 회의에 참석했다. 이들과의 대화는 350시간에 달했고 사장단과는 8000시간에 걸쳐 토의했다. 귀국 후에도 이건희의 개혁은 그치지 않았다.
그해 7월에는 7시 출근 4시 퇴근을 골자로 하는 7.4제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러시아워 시간을 피함으로써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일 뿐 아니라 구성원들이 일찍 퇴근함으로써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겠다는 의지를 담고있었다. 아울러 현 상황이 비상체제임을 구성원 모두가 몸으로 체험하도록 하겠다는 복안이 담겨있었다.(P 000참조)
아울러 10월에는 비서실 개편에 나섰다. 삼성전자에서 비서실의 역할은(p000참조) 계열사의 사업을 조정하고, 대규모 사업을 직접 결정하는 '대본영'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러한 비서실의 변화는 개혁에 대한 이건희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이수빈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프랑크푸르트 회의 당시 자신의 질경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한 문책이었다.
새로운 비서실장에는 삼성종합건설 사장을 맡고 있던 현명관이 선임됐다. 현명관은 삼성의 주요 경영진 가운데 하나였지만 삼성 공채 출신이 아니었다. 당시 삼성은 순혈주의 문화가 가장 강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일본 등에서 우수한 인재를 영입해도 이들은 배타적인 현장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현명관을 중용한 것은 "앞으로 삼성에서 순혈주의는 없다"는 이건희의 선언과 마찬가지였다.
연말 정례인사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재무 등 관리형 인사들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기술직 출신들이 중용됐다. 세대교체도 진행됐다. 아울러 기존 임원 가운데 상당수는 신설된 보좌역으로 물러났다. 보좌역은 말 그대로 사장을 보좌하는 역할로 실질적인 책무가 없었다. 이를 통해 이병철 시대의 인사들은 대거 조직에서 물러났다. 바야흐로 이건희 자신의 철학을 담은 경영을 시작한 것.
이같은 개혁은 1993년 3월부터 7월까지 4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하지만 이를 위한 준비는 회장 취임 이후 6년 동안 준비됐다. 취임 초기 기존 기득권을 갖고 있는 구인사들과의 마찰은 아직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 이건희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아울러 삼성 역시 흔들릴 수 있었기에 그는 차근차근 개혁을 준비해왔다.
1990년에는 비서실장을 맡고있는 소병해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1978년부터 12년동안 삼성 역대 최장수 비서실장으로 그룹의 살림을 도맡아온 소병해의 퇴진 역시 취임 3년 후에야 이뤄졌다. 서서히 정권교체의 움직임을 보인 것. 하지만 소병해에 대한 예우도 한치 부족함이 없었다. 이건희는 물러나는 소병해에게 "소 실장은 그룹 최고의 공로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아울러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중용했다. 이병철이 회장을 맡고 있던 당시에도 그룹의 실세 역할을 해온 소병해는 새롭게 경영을 시작하려는 이건희에게는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기반이 마련된 이후에야 그를 비서실장에서 퇴진시켰다.
이같은 이건희의 장기적인 그룹 개혁 로드맵은 우랜 시간을 두고 지속됐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2년 후인 1995년 3월에는 휴대폰 화형식(P000 참조)을 통해 삼성 임직원들을 직책하는 한편, 다시 한번 질 경영을 강조했다.
수년여에 걸친 이건희의 개혁은 오늘날 '품질의 삼성'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디자인 고문이었던 후쿠다의 의견이 경영에 반영됨으로써 삼성 제품은 강점 가운데 하나로 우수한 디자인이 꼽히고 있다. 그간 국내 기업 가운데 상당수는 2세의 경영승계 이후 갑작스런 변화의 부작용 등으로 회사가 사라지거나 그 세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건희는 6년 이상의 기간을 들여 개혁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했다. 재계에서는 "이건희 취임 이후 삼성이 곧바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시작했다면 지금의 삼성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룹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에도 10여 년 동안 묵묵히 이병철의 뒤에서 때를 기다려온 이건희는 삼성의 수장이 되고 나서도 결코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이는 이후 그의 경영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기다람의 미학은 삼성의 지속적인 성장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