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의 트렌드 브리핑] 막걸리 권하는 시대

2010-04-1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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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별 박물관을 다 다녀 봤지만 '막걸리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원당역에서 300m 거리에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막걸리 중 하나라는 '배다리막걸리'의 본점, '배다리 주(酒) 박물관'이 있었다.

95년 전 경기도 고양시 주교리 56번지에서 창업한 1대 박승언 옹의 양조장이 5대째 가업으로 이어지며 명물이 되었다가 너무 유명해져 급기야 박물관이 됐단다.

말이 박물관이지 사실은 막걸리집을 겸한 소박한 전시공간이다. 술도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식당처럼 차려진 술집 위 2층에 옛날에 사용했을 법한 술 빚는 도구와 조형물 등이 전시돼 있는 정도다. 큼직한 나무 술동이를 자전거 뒤에 싣고 길을 나서는 남자, 양조장 집 주인과 채로 무언가를 걸러내는 일꾼, 누룩을 짓이기는 아낙네 모습의 조형물이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 중 압권은 소박한 막걸리 상차림 앞에 선글라스를 낀 채 앉아 '탁배기' 사발을 드는 모습의 박정희 전 대통령 조형물이다. 빨간 김치 보시기와 쭉쭉 찢어진 명태포, 막걸리 주전자와 양은 사발 등이 놓인 탁상 앞에서 그는 '씨익' 미소지은 모습으로 앉아있다. 1966년 어느날 경기도 고양시 삼송리에 있는 '실비옥'이라는 주막에서 벌어졌던 장면을 재연해 놓은 것이라 한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배다리 막걸리의 유명세가 바로 그날부터 시작된 박 전 대통령의 애용 덕이라는 건 막걸리계의 전설이다. 당연히 그래서겠지만, 박 전 대통령이 바닥에 주저앉아 사람들과 막걸리 잔을 주거니받거니하는 장면이 담긴 옛 사진도 조형물 배경에 전시돼 있다.

여름날 반팔 속옷 차림에 밀집모자를 쓰고 농군들과 어울려 막걸리 사발을 주고받는 절대 권력자의 모습이라니. 그 아이러니한 느낌과 질박담백한 모습이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즐겼다는 바로 그 막걸리 한 주전자를 따끈한 두부김치 안주와 꿀떡꿀떡 들이켜 얼근해 진 상태에서 막걸리에 얽힌 옛 장면들을 감상하노라니 왠지 그냥 넘어갈 주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스쳤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고나 할까? 문학소년 시절 멋부리며 외웠던 박인환의 시구까지 떠오르며 서서히 취흥이 올랐다. 막걸리의 참 맛이 바로 이런 감상의 긴 꼬리인가? 대학시절, 농촌활동 때 밭일 중간에 들이켰던 새참 농주의 추억도 아련히 떠오르는 게 갑자기 '인생이 뭘까?' 머리 속이 아뜩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 맛이 거의 25년여만에 다시 보는 추억의 맛일세? 불현 듯 그런 생각이 스치자, 갑자기 뿌듯한 기분에 젖어 들며 "왜 그동안 이런 옛 맛을 잊고 살았을까?" 후회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성분표시를 자세히 보니 대부분의 막걸리에 첨가된 아스파탐이 표기돼 있지 않았다. 쌀 90%, 소백분 10%, 도합 100%다. 담백하면서도 혀 끝에 감기는 살짝 들큰한 맛이 그 옛날 농촌에서 얻어 마셨던 새참 농주, 딱 그 맛이었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과연 불황 중에도 막걸리시장은 거의 유일하게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막걸리 소비량이 급증하는 가운데 불과 2년 뒤 1조원대 시장으로 커질 것이라는 업계의 전망에 국내산 막걸리가 수백만 달러어치나 중국 등지로 수출되고 있었다. 식품 대기업들도 체면상 머뭇거리지만 막걸리시장에 군침을 흘리는 중이다. 그럼 그렇지.

인공 감미료로 혀 끝의 화학반응을 조작하는 맛이 아니라, 자연 발효와 숙성으로 은근히 우러나와 혀가 스스로 감기는 그 맛의 막걸리라면 곧 맥주와 소주 시장을 제압하고도 남으리라, 응원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막걸리 열풍의 핵심은 결국 맛을 우려내는 정성, 그것도 옛날식 정성임을 새삼 확인한 하루였다. '보람찬 하루'의 마감 무렵에 '옛 것이 오늘을 있게 하고 그 오늘이 내일을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가 통하는 세상을 위하여 막걸리 건배를 감히 제의해 본다. "우리 쌀 막걸리를 위하여!"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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