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는 뭐니뭐니해도 현금이 왕.'
경기가 어려워지면 안전자산 선호도가 높아진다. 대표적인 안전자산이 바로 현금이다.
세계적인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가보다. 지난해 세계 주요 기업 CEO들이 받은 연봉 총액은 줄었지만 현금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진 것. 경기침체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미래 가치를 염두에 둬야 하는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 대신 현금을 택한 것이다.
미국 경제 전문지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4월 5일자 최신호에서 미국 주요 기업 CEO들이 지난해 받은 연봉은 전년 대비 8.6% 감소했지만 현금액은 8.3% 증가했다고 전했다. 이는 스탠더드앤푸어스(S&P) 500지수 편입 기업 중 2008~2009년 CEO 교체가 없었던 81개 기업 CEO 연봉을 분석한 결과다.
S&P 500기업의 CEO 연봉은 2000년 정점에 달했다가 최근 3년 연속 내림세를 기록했다. 2000년 평균 연봉은 1460만 달러였지만 2008년엔 40%나 뒷걸음쳤다. 지난해엔 금융기업을 중심으로 연봉 감소폭이 컸다. 조사 대상에 오른 20개 금융기업 CEO의 지난해 연봉은 전년에 비해 평균 2800만 달러 삭감됐다. 이 가운데 11개 기업은 미 정부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아 급여 제한 대상에 올랐다.
눈에 띄는 건 전체적인 연봉 액수가 줄어든 대신 현금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81개 조사 대상 기업 중 43개 기업이 CEO의 기본급을 평균 8.9% 인상하면서 현금 비중을 늘렸다.
실적에 따라 주는 보너스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높아졌다. 지난해 CEO들이 받은 현금 보너스는 평균 210만 달러로 전년 대비 7.9% 늘었다. 특히 종합화학업체인 다우케미컬의 앤드류 리버리스와 보험사 아플락의 다니엘 아모스 CEO는 각각 450만 달러와 410만 달러를 보너스로 받았다.
비즈니스위크는 이처럼 CEO들이 지난해 과거보다 더 많은 현금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장기 실적을 기반으로 받는 스톡옵션의 비중을 줄였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주가가 폭락하고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옵션과 주식의 미래가치를 제대로 예측하기 어려워 스톡옵션보다 현금을 선호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급여 전문 컨설턴트 스티븐 홀은 "스톡옵션은 매력이 떨어지면서 인재를 붙잡아 둘 수 있는 당근으로서의 기능이 축소됐다"며 "기업들은 인재를 경쟁사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현금 보상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들도 스톡옵션 대신 현금 보상을 선호하는 추세로 돌아서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증시가 폭락하면서 CEO들이 스톡옵션을 통해 주식을 싼 가격에 매입한 데 이어 올해 증시가 반등하면서 스톡옵션의 가치 역시 급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CEO들 역시 막대한 차익을 실현했다는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스톡옵션을 꺼리고 있다.
이사회가 실적 목표치를 낮춘 것도 CEO들의 현금 보너스를 두둑하게 했다. 이사회가 스톡옵션을 주는 대신 실적 목표치를 낮춰 잡아 CEO들이 쉽게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서 보너스로 챙길 수 있는 현금이 늘어난 것이다.
정밀유리생산업체인 코닝의 지난해 주당 실적은 12%나 하락했지만 웬델 윅스 CEO는 전년(30만1584 달러)에 비해 15배가 넘는 480만 달러를 보너스를 챙겼다. 이에 대해 코닝은 "실제 보너스 수령액에 예상치 못했던 변수로 인한 부족분을 만회하기 위해 성과 기준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비즈니스위크는 CEO들의 현금수령액 증가와 함께 연 실질소득액을 기준으로 하는 연금 역시 증가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CEO들은 전년대비 15.4% 늘어난 130만 달러의 연금을 받았다. 다만 기업들이 CEO용 전용제트기나 클럽회원권 등에 들인 금액을 23% 줄이면서 CEO들이 누리던 각종 호화로운 혜택들은 사라졌다고 비즈니스위크는 덧붙였다.
아주경제 신기림 기자 kirimi99@aj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