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저녁 일본 도쿄의 아카사카 골목에 자리한 모리타(森田)이용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 모리타 야스히로(62)씨가 손님을 맞았다.
호암 이병철에게 ‘이발사의 직업정신’ 감동을 준 일본 도쿄 모리타이용점의 2세 모리타 야스히로씨 |
“호암께서 1987년 타계하신 후 제 부친도 2005년 작고하셨습니다. 재벌회장이셨지만 서민의 눈 높이에서 격의 없이 저희를 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야스히로씨는 “서울 집에서, 또 여행용으로 쓰시던 헹켈 면도기도 날이 닳으면 갖고 와 날카롭게 갈아달라고 부탁한 적도 많았다”며 “면도기조차 아껴 쓰시는 것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1950년 2월. 호암은 15명의 기업인들과 함께 일본경제시찰단을 구성, 도쿄를 방문했다. 시찰이 끝날 즈음, 호암은 산책을 겸해 아카사카 뒷 길을 걷던 중 한 이발소를 발견했다. 가게 입구에는 ‘모리타(森田)이용점’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마침 머리를 자를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터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주인은 40세 전후로 보였다.
의자에 앉아 가위질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맡기고 있던 호암은 가볍게 말을 건넸다.
"이 일을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이 이용점은 1878년 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3대째입니다. 가업으로 잇고 있으니 70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식 놈도 이 일을 이어갔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깊은 생각 없이 툭 던진 질문이었지만, 주인의 답변은 정신을 깨우는 힘이 있었다. 머리나 깎는 일이었지만, 대를 이어오고 또 자식까지 물려주고 싶어하는 장인정신에 큰 감명을 받았다.
호암이 처음 만났던 그 주인의 뜻대로 이제 아들 야스히로씨가 대를 이어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야스히로씨는 80년대부터 부친을 도와 일했기 때문에 호암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부친이 자리를 비웠을 때 두어 차례 본인이 직접 이발해 준 적도 있다고 했다.
모리타 이용점 입구 |
야스히로씨는 “삼성그룹이 글로벌시장에서 선전(善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치 내 일처럼 기쁘다”고 말했다.
호암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일본에는 튀김가게, 과자가게, 여관 등 각 분야에 걸쳐 5대~16대씩 이어가는 노포가게들이 많다. 이러한 직인정신(職人精神)이 일본을 다시 살려낼 것이다”고 술회했다.
실제로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각 분야마다 장인정신으로 무장된 일본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부활했다.
이병철은 삼성 역시 ‘100년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의 장인정신을 삼성의 정신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슴 깊이 새겼다.
그는 삼성의 목표 중 하나를 ‘품질 제일주의’로 삼았다. 자연히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실행 플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호암은 무역에서 제당, 의류, 제지, 전자, 반도체 등 숨쉴 새 없이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철저한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내자’고 독려해왔다. 이는 이건희 2대 회장의 ‘질경영’으로 이어졌다.
호암과 이건희 회장의 장인정신과 품질경영을 DNA로 함양한 삼성그룹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호암이 1938년 부친으로부터 받은 쌀 300석을 밑천으로 출발한 삼성그룹은 호암이 타계할 당시(1987년) 그룹 매출 12조원을 달성했다.
이어 이건희 회장시대를 거치면서 전 세계 30만명의 종업원에 연매출 200조원을 넘어서는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호암이 생존했더라면 12일 백수(百壽·100세)를 맞아 무슨 얘기를 했을까. 아마 다음과 같은 얘기가 아닐까.
‘그동안 고생들 많았데이. 허나 자만하는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없다는 걸 명심하라. 도요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라. 1등에 만족하다가는 순식간 벼랑으로 떨어진다. 지금부터 허리띠 단단히 매고 10년, 20년 후에도 앞서 나가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
도쿄(일본)=김재환 기자 kriki@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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